전체보기/한반도 전쟁 임박 설!

#52 한반도 전쟁 임박 설! (2부) - 산악전과 시가전

wenaon 2017. 4. 27. 15:41
반응형

(제 2부)



현대 전투기들은 멀티 능력을 가졌다. 전투도 하고 폭격도 하는 그런 멀티가 아니고, 장거리 전투인 BVR에도 능하면서, 도그 파이팅에도 일품이라는 이야기다.


미국의 차기 스텔스 전투기 사업에서 낙선한 노스럽 F-23 블랙 위도우 II. 스텔스 성능에선 라이벌인 록히드의 F-22 랩터보다 뛰어났다.



*검은 옷의 미망인이라는 독거미, 블랙 위도우! 출처: nationalinterest.org



그런데 블랙 위도우는 단 2대 만이 만들어지고 (2번째 기체는 다른 이름으로 회색 유령 '그레이 고스트’다). NASA에 보내졌다가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세기의 경쟁이라는 록히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스텔스 성능에 좋았는데, 왜 랩터에게 밀렸나? 스텔스보다 신경을 덜 썼던 부분인, 도그 파이팅에서 랩터한테 조금 뒤졌기 때문이다.


미 국방성은 당시의 소련 전투기 SU-27 프랭커와 MIG-29 펄크럼에게, 장거리에서도 압도하고 단거리에서도 압도하길 원했다. 스텔스 기체라 해도, 도그 파이팅 쪽에도 소질 있기를 바란 것.


그런데 F-22 랩터는 러시아의 데드리 듀엣, 수호이와 미그한테 이길 것으로 추정됐으나, F-23 블랙 위도우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가격도 조금 비쌌고...)



*스텔스의 약탈자 랩터! 출처: nationalinterest.org



아니 그런데, 스텔스가 안 보이면 되지, 무슨 접근전까지? 그런데 레이더에 잡히지 않을 뿐, 이게 일단 가시거리에 들어오면 눈에 더 잘 띈다. 밤손님으로서의 위장 색, ‘건십 그레이’라는 검정 회색을 칠해 그런가?


그렇다 해도 도그 파이팅에 약하지 않다. 워낙에 비싼 기체이며, 기존의 모든 기술을 다 집어넣은 전투기라, 경쟁에서 패배한 블랙 위도우조차 뛰어난 기동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독거미의 경우, 기동성에서 F-15 이글을 능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세상의 파일럿들은 도그 파이팅을 싫어한다고 하니까. 좋은 전투기에 탄 파일럿일 수록 더욱 그렇다고 한다.



파일럿들은 접근전이 싫다



지금의 하늘에서 최강으로 군림하고자 할 때, 필요조건은 성능 좋은 레이더와 사정거리가 긴 미사일이다. 멀리서부터 적기를 먼저 캐치하고, 중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



*출처: blogspot.com



그러니까 ‘먼저 보고, 먼저 쏘는 것’ 이게 현대 전투기의 조건이며 패션이다. 그런데 적기를 미사일로 잡지 못 했을 때, 아니면 갑자기 기습을 당했을 땐? 당연히 플랜 B인 도그 파이팅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휘말려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왜 이들은 왜 접근전을 싫어할까?


잘 못 하면 3류 전투기에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삐끗하면 올드 타이머한테도 당한다. F-15 이글은 올드 타이머 미그 -19한테도 당할 수 있고, SU(수호이)-35S인 슈퍼 프랭커도 우리 공군의 F-5E 타이거한테, 꼬리를 물려 불덩어리가 될 수 있다.



*SU-35S 슈퍼 플랭커. 출처: defenceindustrydaily.com



거기엔 탐지거리가 긴 고급 레이더도, 또 정교한 시커(Seeker)를 가진 중장거리 미사일도 별 볼일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난전(亂戰)을 펼치다, 자기편이 쏜 미사일에 맞을 수 있고, 또 근처에서 폭발하는 다른 기체의 파편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러다가 꼬리를 잡혀 황천 행에 오를 수 있다. 운 나쁘면 그렇게 된다.


우리나라 조기 축구회도 바르셀로나나 첼시와 붙을 때, 득점 올릴 수 방법이 있다. 문전 혼전 중이다. 그때는 뛰어난 개인기보다 운빨이다. 공이 이리저리 튕겨 자기 앞에 떨어질 때 그대로 욱여넣으면 들어간다. 메시도 재수 없으면 이때 자살골을 넣을 수 있다. 골 에어리어’에서 십 수 명의 선수가 엉켜 난리 치는 상태 아닌가?


그래서 고급 전투기를 모는 파일럿일수록 도그 파이팅은 싫어하는 것이다. 실력으로는 얼마든 이길 수 있는데, 운도 작용하기 때문. 그런데 지상 전투의 지휘관들도 싫어하는 전투가 있다.  



지휘관도 싫어하는 전투가 있다



일급 병사를 데리고 있어도, 성능 좋은 무기를 갖고 있어도 싫어한다.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런 전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시가전. 제2차 대전 중 가장 유명한 전투이면서 규모가 컸던 시가전이 있었다. 볼가 강변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다.  



독일군 정예 30만 명 사라지다



제2차 대전 때 정강(精强)의 독일군. 그야말로 불패의 군대 아니었는가? 인류 사상 최강의 무장 집단이었다고 하는 ‘독일 기갑부대’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르막트’라 하는 독일 육군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들한테는 이런 멘션이 붙는다.


“1명의 독일 군 소대장이 지휘하는 독일군 소대를, 세상 어떤 나라의 소대장과 그 소대가 이길 수 없다.”


미군을 비롯해 모든 연합군을 통 털어도, 독일군 소대를 1:1로는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




*독일의 강하 사냥꾼(엽병)들, 크레타 전 이후 대부분이 지상전에 투입돼, 강하용 헬멧은 안 보인다. 출처: pinimg.com



1941년, 그런 강력한 군대가 발바로사 작전 발동으로, 물밀듯 소련 영토로 쳐들어간다. 소련군은 연전연패, 독일군은 연전연승.



*출처: worldwarphotos.info



특히 기갑부대의 질풍 같은 대시와 기동 포위전에, 소련군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대규모로 포위되고 궤멸되어 갔다. 키예프에만 7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어서 독일군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격을 한다. 그리고 볼가 강까지 진출, 그 강 언덕에서, 끝없이 펼쳐진 맞은편 피안의 대지를 보며, 장교나 병사할 것 없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아~ 저기부터 아시아 땅이야.”


그들이 또 한 번 진격해 들어갈 미지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강변 아래쪽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스탈린그라드.


헌데 히틀러도 스탈린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그 도시에, 두 독재자는 뭐에 홀린 듯 병력을 쏟아부었고,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가전이 펼쳐진다.


소련 병사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어느 주머니에도 피가 흥건했어. 백병전 끝에 죽였던 독일 놈들 피지.”


독일 병사들도 이렇게 말했다. 


“우린 지금까지 러시아 놈들은 다 형편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야. 그들도 우리만큼 자기네 하이마트(조국)를 사랑한다는 걸 이놈의 도시에서 알았거든, 아니 그 마음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 강해.”



*출처: independent.co.uk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되는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볼가 강 강변까지 도달했던 정예 제 24 기갑사단을 비롯해, 3개의 기갑사단과 3개의 기계화 사단, 그리고 여러 개의 척탄병 사단들은 모두가 그 운명의 도시에서 궤멸된다.


그뿐인가? 포위망 속에 갇혀 있었던 독일 군과 추축 군 합쳐 30만의 장병. 그중 10만 명만이 살아 포로가 된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중 살아서 고향을 밟은 자는 겨우 수천.


포로수용소 내에 장티푸스인가가 발생했기 때문. 위키피디아에서 보면,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제 6군의 포위망을 풀기 위해 필사의 구출전을 전개하거나, 시 외곽의 전역에서 싸웠던 모든 독일군과 추축국 병사를 합쳐 83만 4천 명이 전사했거나 부상, 행불, 포로가 됐다고 한다. 거의 백만으로 가는 숫자, 입이 딱 벌어진다(위키피디아의 숫자다.).


그 유명한 롬멜 휘하의 아프리카 콥스, 아프리카 군단은 말 그대로 군단이었다. 하나의 군단. 그런데 스탈린그라드와 그 전역에서의 전투는 이런 군단을 3~4개 가진 군이 무려 6개, 물론 여기엔 루마니와 헝가리의 병력도 있었지만 어쨌든 아프리카 군단과는 단순 비교만 해도 10배 이상의 규모다.


그런데 이들은 참패한다. 주력인 독일군, 전투의 프로페셔널로서 스피디한 전진과 우회 포위, 섬멸 작전의 도사들. 그런데 어쩌다 스탈린그라드와 그 전역에서 몇 달간 전진이 안 되고 고전하다가 결국은 전멸을 당했나? 그래서 히틀러는 모든 국민에게 음주 가무를 중단케 하고, 자신도 힘들고 우울한 날을 보내야만 했나?


시가전 때문이다.  



독일 군을 집어삼킨 시가전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이상한 게 있다. 독일 군의 대단한 승리 중 하나였던 키예프 역시, 도시가 아니었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시. 거기선 왜 소련군이 시가전을 펼치며 버티지 못했나? 그리고 역사상 최대의 포로를 배출하며 독일군에게 최악의 참패를 당했나?


그건 독일의 기갑 부대가 도시를 우회해 완전 포위했기 때문이다. 빠져나갈 곳도, 보급받을 곳도 없이 포위됐다. 독일군의 장점이 최대로 발휘된 전투였다.


허나 스탈린그라드는 우회할 수 없었고 포위할 수도 없었다. 볼가와 돈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던 강변 도시였기에 그렇다. 유빙이 흐르는 돈강.


따라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려면 그대로 육박. 시가전 이외의 방법이 없었다.(영화 에네미 엣 더 게이트를 보면, 주인공을 비롯한 보충병들이 총탄 속에 강을 건너는 게 나온다. 바로 그게 스탈린그라드 배후의 볼가 강이다.) 그런데 그 도시를 지키는 병사들은, 하우스 투 하우스, 처절한 접근전을 전개하며 주머니마다 독일군의 피가 흥건할 정도로 저항을 했다. 이것이 바로 불패의 독일군 수 십만을 참패의 수 십만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시가지는 제2차 대전이라는 거대 전쟁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이번엔 또 다른 시가전, 하나를 한 번 꺼내보자. 스탈린그라드로부터 55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 체첸 사태.



20세기 최후의 시가전 그로즈니



정규군도 아닌 민병대 내지 반군이 틀어박혀 싸웠던 체첸 그로즈니 시가전. 물론 외국 용병도 소수 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시에서 그들은 저항을 결심했고, 엘친은 강력한 기갑부대를 들이민다.


이때가 1994년 느지막한 겨울(12월이다). 20세기 전쟁사에 기록되는 마지막 주요 전투. 그들은 AK 소총과 RPG 대전차 발사기를 가진 경무장 집단. 그 외에 소련 제 분대 용 저격총인 SVD 드라구노프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저격이 난무했다고 하니까. 어쨌든 기본적 보병 무기만을 갖춘 평범 이하의 군대였다.



*SVD 드라구노프 저격총. 출처: dragunov.net



그런데 어떻게 됐나? 러시아 군은 작살이 났다. 용감한 체첸 인들은 건물 뒤에 숨어 저격을 하고, 탱크나 장갑차한테는 RPG의 그 ‘할례 받은 유대인 꼬추’를 날렸다(예전 냉전 시대, 아프리카에서 싸웠던 백인 용병들의 속어). 탱크와 보병장갑차는 불에 타고, 소련 병들의 이마엔 (그들 소련 지휘관 이야기로)조그만 구멍들이 자꾸 뚫렸단다.




*출처: dailymail.co.uk



그리고 체첸 반군은 소련 병 시체를 쌓아 올려 바리케이드를 치고, 좁은 도로의 소련 탱크들은 어찌할 수 없어, 자기네 병사 시체를 밟고 그대로 전진한다. 그래서 그로즈니하면 코카사스 지방에선 참혹함과 동일어로 부상한다. 필자가 동일어 하나를 추천하면. ‘소련 병 시체 수난의 도시’ 



*출처: mirror.co.uk



체첸 공화국 인구가 70만이 안 되던가? 이런 작은 나라, 작은 도시에서 고전하던 러시아 군은 2년 뒤인 1996년 겨우 진압에 성공한다. 체첸의 리더이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두다예프를 죽이고.


그러나 시가전 말미의 전과가 아니라, 위성으로부터 유도를 받는 122밀리 포의 포탄 덕분이었다.



*결국 두다예프는 죽고, 체첸 독립은 좌절됐다. 그리고 남은 건 두다예프의 체첸 어머니에게 드리는 글... 출처: orig09.deviantart.net



시가전이 이런 것이다. 그 거리와 건물들을 단호히 지키고자 결심이 선 병력이 포진해 있다면, 그 병력의 10배가 넘는 숫자를 동원해야 들어갈 수 있는, 10배 법칙에 해당되는 전투.


이러니 지휘관들은 시가전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이기기도 힘들고 이긴다 해도, 많은 시간과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니까. 그런데 지휘관이 싫어하는 게 하나 더 있다.


산악전이다. 언덕과 계곡, 능선과 산이 많은 데서 벌어지는 전투. 



산악전도 시가전만큼 어렵다



미군은 북 아프리카 전 초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독일 군한테 고전했으나, 전투 경험을 점차 쌓으면서 그리고 월등한 물량작전으로 롬멜이 빠진 아프리카 군단한테서 항복을 받아낸다.


결국은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진격지는? 지중해 너머의 이태리 반도였다. 그리고 용약 시실리 섬에 상륙한 뒤, 이태리로 건너간다.



*이태리 장화반도 코앞에 시실리 섬이 보이고, 연합군은 이 섬에 상륙한 뒤, 본격적인 이태리 공략을 시작한다. 그러나... 출처: albatros.se



목표는 영원의 도시 로마! 그런데 웬걸, 북 아프리카보다 더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투 경험을 제법 쌓았는데도 불구하고, 물량이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전진이 더디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 정도인가? 다른 곳의 연합군은 쾌속의 전진이 이뤄지고, 그래서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가 자살할 때까지도, 이태리 반도에서의 완전 승리는 없었다.


히틀러의 자살 이후, 본국 훈령에 따라 항복을 한다는 독일 군 지휘관의 의사표시가 있기 전까지. 그 대표적인 고전이 카시노 산의 전투.



*연합군 폭격으로 폐허가 된 몬테 카시노 사원과 정상. 독일군은 그 와락 속에 숨어, 끈질기게 저항을 했다. 출처: wikimedia.org



5만 5천의 사상자가 나온 카시노 산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미군과 영군,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자유 프랑스 군에다 인도와 남아공 군, 그리고 언제나 용맹했던 폴란드 군 등을 합쳐 24만 명을 투입한다. 아마 제2차 대전 중, 이렇게 많은 나라의 군대가 단일 전투에서 참가 한 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반대로 독일군은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 병력 증파도 쉽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사상 최대의 기갑전이라 할 만한 쿠르스크 전투가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독일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숱한 폭격기가 연일 폭격을 해 대고, 2천여 대의 탱크가 연합군 쪽에 있었는데도 버티어 낸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크지도 않은 지역에서의 연합군 사상자 수를 무려 5만 5천까지 나오게 한다.


독일군의 전사자는 2만(사상자가 아닌 전사자 숫자). 그리고 독일 지휘관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자, 유유히 철수한다.



*멀리 산 정상에 새로 지어진 카시노 수도원이 있고, 뉴질랜드 관광객이 뉴질랜드 병사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출처: blogspot.com



독일 군 선전의 원인은 무엇일까? 산악전이기에 그렇다. 로마로 전진하는 길을 따라 산이 있는데, 그곳에다 진지를 쌓은 독일군.


그래서 연합군은 그곳을 기어올라야 했고, 독일군은 폭격의 와락 속에 몸을 숨긴 체 방어를 하는 형태. 그렇다면 지휘관들이 왜 시가전 못지 않게 산악전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유럽 대륙, 유일의 독일군 패배 지역



노르망디 상륙전 이전까지. 독일은 유럽 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컨트롤하고 있었다. 북쪽의 노르웨이에서 부터, 저 남쪽 발칸 반도를 거쳐 그리스까지. 그런데 단 하나, 독일군이 점령하지 못한 데가 대륙 내에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산악지대다. 역시 독일군 엘리트 들인 알파인 부대, 즉 산악 사단이 이곳으로 투입되고(이들의 부대 마크는 산에 피는 꽃 에델바이스다.), 또 강하 사냥꾼인 엽병 부대가 투입되지만, 결국은 작전 의도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독일의 ‘게비리기 야거’ 우리말로 하면 경보병 산악 사냥꾼. 출처: ytimg.com



이런 불굴의 유고 파르티잔들. 프랑스 조차도 연합군의 진격으로 해방이 됐지만, 나중 이들은 산에서 내려와 독일군을 몰아내고 자기 조국을 해방시킨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개마고원이나 태백산맥에서 유격 활동하던 독립군이, 자력으로 대한민국을 해방시킨 셈.



*늠름하여라 유고 파르티잔, 영국군은 이들에게 자주 무기와 물자들을 공수해 줬다. 출처: ytimg.com



그래서 독일의 어떤 SS 무장 친위대 사령관 커리어를 보면, 바로 이들 유고의 파르티잔에게 잡혀 직접 처단 당했다는 진(?)기록도 있듯, 티토 휘하 이들은 정말 대단한 전투력을 가졌었다.


초기엔 8만 명이었으나, 점점 더 불어나 나중엔 수 십만 명까지 확대됐던 군사 집단. 이들의 구호는 간단했다.


“파시스트에게 죽음을! 민중에게 자유를!”


어느 나라에나 있듯, 자기네 유고의 배신자들이며 나치 부역자들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이 교수대에 서서, 마지막 외쳤던 소리였다(유명한 사진이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 이럴 때 찾으면 꼭 안 보인다;).



*지도 위 붉은색이 1943년 경 유고 연방 내의 파르티잔 지역, 바다 건너 이태리 지도와 비교하면 대단한 힘을 가졌던 거 같다. 출처: wikimedia.org



그래서 나중 동유럽의 모든 나라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으나, 유고슬라비아는 모스크바에 맞서 독자의 길을 간다.


“니들이 해 준게 뭐 있는데?”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은 소련군이 진주해 나치를 몰아냈으나, 유고는 소련한테 신세를 진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에 의해 독일군을 몰아냈으니까.


그런데 이 모든 건 무엇 때문인가? 독일군이 그들의 엘리트 부대, 낙하산 사냥꾼이나 경보병 산악부대를 파견, 여러 번 토벌을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한 이유.


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한반도는 어떤가? 지형적으로 거의가 다 산이다. 국토의 7~80 프로가 산이라니까. 그래서 우리는 산악전이다. 몹시 힘이 드는 산악전이다. 특히 침략자에게 더욱 더 그런 전투 형태.


그러나 그뿐인가? 시가전도 벌어진다. 산과 산 사이, 평지에 주거지가 있다. 그중 인구 밀도가 많으면 도시가 되고. 외국 사람들은 그래서 참 신기해한다.


“어떻게 이런 좁은 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나?”


서울과 경기도, 외국인 눈으로 보면 상당히 좁은데, 여기에 사는 옹기종기 2천1백만 인구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북한이 서울 북방으로 쳐 내려온다면? 시가전이 된다. 그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전투는 자연스레 두 가지다.


가슴을 에는 단장 그런(斷腸)의 전투가 될 게 틀림없는 두 가지 전투 형태. 그게 서울 북방에 펼쳐질 전투인 것이다.  물론 강원도 동부 전선 쪽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제 2부, 끝)





김은기의 커피 테이블 토크


*제공 @snaparker



간만에 고교 시절 선배와 후배들을 만났다. 그중 한 선배는 중남미 쪽, 니카라과나 엘살바도르에서 봉제 공장을 계속한 미국 시민권자로, 근래에는 서울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그 전쟁 임박설, 전쟁 발발설로 옮겨가자.


“야, 며칠 전, 그 친구한테서 문자가 오더라고.”


그 친구는 꽤 큰 기업체의 부사장을 했었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문자 내용은.


‘전쟁 터진다는데, 서울에 있는 게- 어떻게 걱정 안 되셔?’


이런 내용이었단다. 그러니까 괜스레 한국에 나와 있다가,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면 골치 아프잖아? 이런 의미의 물음. 선배 그 문자를 생각하면 짜증 난다는 듯 말한다.


“야, 이거 진짜 어이없지 않냐? 70대 할머니나 할배라면 몰라도, 나~ 원, 대기업 부사장까지 지낸 배웠다는 사람이, 무슨 전쟁 타령이야.. 그래서 나도 문자 보냈지.”


문자 내용은.


“전쟁은 무슨 개뻑다귀 전쟁? 아니, 미국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 아쇼? 자기 국민들 안전에 대해 철저해. 그런데 한국에 사는 미국 사람이 6만 명인가 몇 만인가 된다는데, 진짜 전쟁이 임박했다면 그 재빨리 연락합니다. 오산 비행장이나 성남 비행장으로 언제 몇 시까지 집합하라고. 비행기 타고 토끼라고!”



*출처 channelnewasia.com



이어서 자기 핸드폰을 꺼내, 선배가 하는 말.


“그런데 미국 정부에서 보낸 어떤 문자도 없어. 아이 씨~ 유 에스 가버먼트는 이렇게 자기 국민한테 관심이 없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