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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세계 각국의 전차 명명법 (5부) - 맹수 도살자와 소련

wenaon 2017. 12. 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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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갑 사단, 동쪽으로!



제2차 대전은 나치 독일의 멸망으로 끝났다. 그 멸망을 이끈 주인공 히틀러. 그는 초기에 뛰어난 전략적 결단을 내리기도 했으나 점차 치명적인 실수를 연발한다. 그중 가장 큰 걸 꼽으라면 소련 침공이다.


어느 독일 군 장교가 부인에게 편지 쓰기를.


“요 며칠 새, 우린 1백 킬로를 전진했어. 그런데 또 1백 킬로가 앞에 펼쳐져.”


“어제까지 3개 사단을 격파했어. 그런데 또 3개 사단이 앞에 진을 쳤대.”


그런 곳이 슬라브 민족의 땅 러시아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


그런데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쳐들어가기 직전, 주저하는 독일 국방군 지휘관들한테 히틀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한다.


“소련은 엉성하게 지은 큰 건물이야. 냅다 문을 차면 그냥 허물어진다고.”


“핀란드에서 봤지? 소련군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세계 전쟁사에서 겨울 전쟁으로 알려진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그들은 이 작은 나라로 쳐들어갔다가 된통 깨져버린다.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가 후퇴하지 못 한 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추위속에 동사를 했기 때문.




*핀란드 스키 병이 동사한 소련군을 보고 있다. 사진 설명에는 ‘왜 소련이 핀란드로 쳐 들어갔나?’ 출처: battleofmoscow1941.com



거칠 것 없는 승리, 그러나...



히틀러가 다시 말한다.

“그래, 그 작은 나라 핀란드한테도 깨진 볼세비키들이야.” 


1941년 소련의 광대한 들판 위로 봄이 지나고 이제 초여름이 오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소련 침공의 작전 명 붉은 수염 ‘발바로사’의 발동이다. 독일군은 소련 영토를 향해 일제히 진격해 들어간다. 무려 150개 사단이다.


기갑 사단, 기계화 사단, 척탄병 사단, 그리고 보병 사단들, 모두가 다 최 정예였고 모두가 다 쾌속의 진격! 선두에 선 것은 당연히 천하에 용명을 떨치던 탱크 부대! 


소련군은 숫자가 많아도 여기저기서 포위돼 궤멸된다. 격파되면 몇 개 사단이 아니라 몇십 개 사단! 포로를 잡으면 몇 천, 몇 만 단위가 아니라, 몇 십만 명 단위! 66만 명이 잡힌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포위 전이 그랬다.



*출처: ww2today.com



“것 봐, 내가 말한 대로 형편없잖아.”


히틀러는 너무도 흡족해했고, 독일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들의 지도자 히틀러는 거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인 사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성품만을 골라, 소유한 지도자라 생각했으며, 독일 병사들은 너도나도 영웅심에 불타, 누가 러시아 땅 깊숙이 들어가나 경쟁하다시피 전진한다.


그런데 이상한 탱크가 등장한다.


웬만한 구경이면 맞아도 튕겨내고, 좀 더 큰 구경으로도 전면 장갑을 뚫기 힘든 탱크. 이후 동부 전선의 양상을 바꾸게 해 ‘게임 체인저'라고 불러지기도 하는 T-34다.



*T-34. 당시의 수직 장갑이었던 탱크에 비해, 차체 앞면 경사가 저 정도면, 거의 유사 스텔스 각도? 출처: wikimedia.org



T-34, 크랙, 또는 게임 체인저



축구에서의 ‘크랙’이라 할까? 게임의 승패를 바꾸는 강력한 에이스. 발바로사 작전에 동원됐던 독일 대부분의 탱크보다 공격력 좋고 방어력 좋고, 무한궤도의 폭이 넓어,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러시아에서의 기동력도 좋았다.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은 미디엄 급인 3호, 4호 전차. 그리고 라이크 급인 체코 제 38(t) 경전차. 어느 것 하나 1대 1로 맞섰을 때, T-34한테는 밀렸다. 타이거를 만드는 중이기는 했으나, 발바로사 작전 발동 때는 어림없었고, 그다음 해 가을부터 선을 보일 예정.


더구나 당시의 독일 탱크들은 장갑의 경사 개념이 없었다. 모두 다 수직 장갑. 그런데 러시아 인들이 만든 탱크는 차체와 포탑을 경사지게 만들어, 같은 두께라 해도 그쪽 방어력이 훨씬 좋았다.


그야말로 T-34 쇼크!



*경사 장갑의 소련 T34 가 독일군의 체코제 38(t)을 밀어붙이고 있다. 옆에는 단포신의 초기 형 4호 탱크, 그리고 뒤 쪽에는 불타는 38(t). 역시 독일 군 탱크들은 모두 수직 장갑이다. 나중 5호 탱크 ’판테르‘가 나와야, 경사 장갑이 된다. 출처: s1.1zoom.me



T-34보다 더 무서운, KV-1과 KV-2 탱크



물론 독일 전차병들의 우수한 기량과, 서 유럽에서의 전투 경험으로 어찌어찌 T-34를 격파하지만, 허약한 전차와 함께 피로감이 점차 쌓여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반면, 초기의 패배에서 살아남은 소련 T-34 전차병들은 경험을 계속 쌓아가는 중, 더구나 슬라브 민족은 저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히틀러는 명령을 내린다.


“T-34를 완전 압도할 수 있는 탱크를 만들어라.”


물론 이 명령엔 T-34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KV도 포함돼 있었다. 중(重) 탱크라 생산량이 훨씬 적었지만, KV도 그들 기갑부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매 한 가지였으니까.


이 KV 탱크에 대해, 당시의 독일 군 상황을 군사 전문가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 보는 게 나타났다. T-34보다 다른데 몸집이 큰 중(重) 탱크다. 그런데 이게 완전 방탄이었다. 여기저기서 쏴 대고 여러 방을 맞췄는데도 꾸물꾸물 굴러왔으니까.”



*KV-1. 발바로사 작전 시, 독일의 강력한 4호 전차가 20톤 조금 넘었으나, 이 러시아 괴물은 무려 43톤! 주포 역시 76.2밀리로 강력했다. 그러나 이 놈만이 아니었다. 출처: o5m6.de



*대전차 포 대신 152밀리 곡사포를 장착한 KV-2. 출처: stevenshobby.com



잘 나갔던 독일 기갑 사단에 불안한 느낌이 돌기 시작했다. 독일 탱크들은 잘 달리고, 정확히 갈기고, 그걸 또 우수한 지휘관 아래에서의 커뮤니케이션과 함께 협동 작전에 능하다는 것. 그리고 탱크 1대, 1대의 전차병들 기량도 매우 뛰어났다.


그런데 그들이 타고 있는 탱크가 방어력이 약하고 펀치력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처음 깨달았다. 서부 전선, 프랑스를 치고 들어갈 때는 몰랐던 일.



독일 탱크가 방어력과 주포에서 열세인 이유



독일 군은 전통적으로 기동을 중시해 온 군대다. 기동을 해서 포위하고 섬멸한다. 이게 독일 군 전투 교리의 중요 ‘코어’였다. 그러다 1차 대전 이후, 기가 막힌 무기를 찾는다. 거기에 딱 들어맞는 무기가 있으니 그건 탱크.


그리고 그 탱크들은 집단으로 만들어 기동 전투를 하게 하는데 그런 전투 수행 방식이 블리츠 크릭! 번개처럼 움직여 때리는 전격 작전이었다.


그래서 독일 탱크들은 무겁지 않았고 주포도 크지 않다. 방어력과 공격력은 나중 문제. 그들에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重) 탱크를 경원한 건 아니다. 어느 지휘관이 중 장갑과 강력한 주포의 탱크를 싫어할까? 그런 타입은 돌파 용으로도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군의 방향이 기동전이라, 중요도에서 나중 순위로 놨다는 얘기다.



*어디 인지는 모르겠으나, 전격 작전 시의 독일 기갑사단. 탱크들이 2호에다 F형인데, 주포가 겨우 20밀리다. 우리 군 발칸 포에 6개 달려있는 포신 중 겨우 하나. 그런데도 그들의 주특기, 기동 포위, 섬멸로 유럽과 러시아를 유린했다. 출처: pinimg.com



독일이 기동성을 얼마나 중요히 생각했나 하면, 전격전 당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3호 탱크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스펜션이 다른 탱크와 달리 ‘토션 바’다(현대의 탱크들은 메르카바 빼고 다 토션 바다).

기술적으로나 탱크의 내부 공간이나 다른 부분에서 문제들이 좀 있긴 있어도, 이 주행 장치를 가지면, 들판 달리기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좀 더 큰 4호 전차는 그럼 뭐 하는데?


3호가 집단으로 전진할 때의 화력 지원이다. 그러니까 설계 상 컨셉은 어시스트 탱크.


그래서 그런 기동 포위 사상에 걸맞은 탱크 집단으로 초기에 승승장구를 했는데, 그만 러시아로 들어가면서 희한한 것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독일과는 다르게 방어와 공격에 웨이트를 좀 더 둔 러시아 탱크들.


그래서 독일도 즉각적으로 대비책을 마련한다.


타이거를 빨리 전력화 시키고, 프랑스와 아프리카에서 무적의 관통력을 자랑하던 88밀리 고사포의 지상 전 용 KWK 36이나 PAK 43 88밀리 포를 장착한 ‘T-34 킬러’들을 부리나케 설계, 공장 문에서 굴러 나오게 하는 것.



속속 등장하는 맹수들



그리고 이 킬러들 이름에 주로 맹수 이름이 붙는다.


이미 1943년 가을, 레닌그라드 전선에 나왔던 타이거를 필두로.


판테르(표범).


엘레판트(코끼리).


그리고 나스호른(코뿔소).


판테르의 75밀리 전차포(이 포는 전쟁 후, 프랑스에서 계속 만들어, 프랑스의 초히트 상품인 AMX-13 탱크의 주포가 된다) 빼고는, 모두가 다 당대 최고의 관통력을 자랑하는 88밀리 포.



*장 포신의 88밀리 엘레판트. 대 전차 중(重) 자주포. 출처: wikimedia.org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를 시점으로 해서, 이 맹수들은 모두가 전선에 나타난다. 당연히 전쟁은 상대적이다. 거기에서 이겨야 최종 승리를 획득한다. 소련이 응답할 차례였다.


“맹수들의 대적자(對敵者)를 한시바삐 전선으로 내 보내라!”



소련의 응답, 쓰베로보이!



설계 단계부터 이름이 붙는다.


러시아 어로 ZVEROB0Y, 쯔베로보이.


영어로는 Beast Killer, 야수 도살자 내지 사냥꾼이다. 어느 책에선 좀 더 살벌하게 Animal Slayer, 맹수 도살자로 쓴다.



*와~박력만점의 헤비급 비스트 킬러! wikimedia.org



적군에서의 정식 명칭은 ISU-152.


I는 발전, 개량이라는 의미의 Impromtu(영어의 Improve.) 뜻이다. 그리고 SU는 자주포. 따라서 ISU-152가 되면 152밀리 대구경 유탄포를 단 개량 형 자주포가 된다.


물론 대 전차포가 아닌 유탄포다. 그러나 초당 600미터로 그 큰 포탄이 날아가니, 1천 미터 거리라면 124밀리 장갑도 뚫는다. 타이거가 100밀리 정도이니, 타이거도 충분히 관통하는 위력.


더군다나 유탄포이니, 독일군의 돌격포처럼, 적의 토치카나 방어 건물도 부수고, 포병처럼 후방에서 포 사격을 할 수도 있다.



소련의 기술적 전통과 유산



물론 이 맹수 도살자의 개발과 생산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게 아니다. 오래 동안의 기술적 축적이 있고, 전통과 유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소련은 그런 것들이 있었다.


이 글 앞부분에 얘기한 ‘몇 방 맞고도 꾸물꾸물 기어 온다던’ 초기의 러시아 중(重) 탱크 KV-1이 바로 그것. 발바로사 작전 초기의 독일군 ‘T-34 충격’에는 수량이 작아서 그렇지, 이 KV-1과 KV-2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바로 그 KV 차체와 서스펜션 위에다 대형 전투실을 설치하고, 소련군 자만의 152밀리 대구경 유탄포를 장착, 이 사냥꾼을 탄생시킨 것이다.



*누구는 맹수 사냥꾼, 누구는 야수 도살자라는 ISU-152. 출처: pinimg.com



그렇다면 이 도살자의 기술적 바탕이 된 KV 탱크에서 KV는 무슨 뜻인가? 조금은 탱크 아카데미 쪽으로의 접근 같은데, 그래도 알아 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 탱크들이 진정으로 무서워했던 이란성쌍둥이 장갑 괴물 KV-1과 KV-2의 KV는 뭘까? 바로 그 1에서 시작해 KV-10까지 줄줄이 개발되고, 냉전 이후 소련의 중 장갑 탱크 스탈린의 오리지널이 된 KV는?  



KV는 스탈린 친구 이름



클리멘티 보로시로프(Klimenti Voroshilov)라는 사람. 공산당 정치가이며 행정가이며 원수 까지 올라 간 군인이었다.



*출처: wikimedia.org



스탈린한테 막말을 해도 괜찮았다는 KV, 한글 위키피디아에선 그 독재자가 허튼소리를 할 때 한방 갈겼다고도 한다.


그리고 KV는 IS, 즉 요시프 스탈린으로 바뀐다. 후반기쯤인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발전을 계속해, 소련 기갑부대의 중핵이 된다. 그야말로 헤비메탈적 이미지를 주는 중 장갑 대 구경포의 탱크.


냉전 시대 이후에도 계속 생산된 그 유명한 헤비급 중 탱크 스탈린의 시작이다.



*IS-3, 스탈린 3호 탱크, 역시 대구경포에 중후한 형태. 출처: wikimedia.org



제식 명 외, 다른 별칭이 없는 소련 탱크들



그렇다면 한 번 간단히 정리해 보자. 미들급 탱크 T-34에서 T는 이미 밝혔듯 탱크라는 의미.


전쟁 초 중반에 활약한 헤비급 탱크 KV-1이나 KV-2는 스탈린과 친했던 군인이자 정치가인 클리멘트 보로시로프의 이름.

IS 시리즈들은 요시프 스탈린의 이름.


SU-85나 SU-100에서, 이 SU라는 단어는 발음하기 어려운데, 삼모~ 우스타노프카로 자주포를 가리킨다, 그래서 SU-85면 85밀리 자주포, SU-100이 되면 100밀리 포를 가진 자주포가 된다.



*85밀리 포의 자주포 SU-85. 출처: hsfeatures.com



그리고 여기에 개량, 발전이라는 뜻의 I자를 앞에다 붙이면, 맹수 사냥꾼인 ISU-152. 개량형 자주포 152.


그래서 소련의 전차 분류는 그리 까다롭지 않다. 독일하고는 탱크의 생산과 운용이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무수히 많은 탱크와 자주포, 사냥 탱크들을 소량 씩 생산하는 ‘다 품종 소량 생산’의 정책이었다.


소련은 미국과 비슷했다. 몇 개의 우수한 탱크를 뽑아, 그것만 줄기차게 만들어내는 정책. 미국도 그렇지 않은가? 죽으나 사나 전쟁 끝날 때까지 M-4 셔먼을 사용했으니까.


물론 소련도 초기엔 많은 종류의 경 탱크들이 있었는데, 차츰 사라지고 오로지 T-34 계열과 KV 계열이 각각 미들급과 헤비급을 나눠 가진다.


하나 예외가 있으니 일전의 글에서 언급한 SU-76 경량 자주포다. 지 몸을 받쳐야 독일 탱크를 잡을 수 있다고 해서 슈츠카(어린 매춘부)라 불렀던 얇은 장갑의 자주포.



어쨌든 소련은 제식 번호, 제식 명뿐이다



하지만 슈추카, 이 이름도 병사들이 붙인 자학적 애칭일 뿐이다. 그리고 맹수 도살자 ‘쓰베로보이’도 그렇다. 설계 때부터 붙었지만 적군 사령부에서 정식 채용이 되지 않았다.


T-34와 개량형인 t-34/85가 10만 대 육박하는 엄청난 생산량인데도 클레믈린에서는 어떤 별칭도 다른 어떤 이름도 붙인 적이 없다. 달랑 1천4백 대 생산한 독일의 6호 탱크가, 타이거라는 불멸의 이름을 얻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탱크로 자리매김을 했는데도.


소련에선 KV나 IS도 그저 식별 명칭의 수준이라 할 수 있을 뿐. 그리고 이런 평면적 명명법은 냉전 이후에도 계속된다.



냉전 이후 현대까지의 탱크들



냉전 시대의 대표적 탱크 T-54, T-55도 그렇고, 이후의 110밀리 활강포를 단 개량 형 T-62도, 또 소련 기술진이 당시의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T-64, 일명 ‘천재가 만든 탱크’도 같은 명명 법이다.



*T-64, 가장 앞선 기술력의 메인 배틀 탱크. 출처: wikimedia.org



그리고 T-64가 지나친 첨단기술로 인해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고, 뭣 보다 가격이 비싸 수출에 문제 있자, 소련은 일종의 핀치 히터 격인 탱크를 등장시킨다.


다운 그레이드 형인 T-72다. 2만 대 이상이 만들어져, 전 세계에 가장 많이 깔려 있는 소련 탱크. 서방측 탱크에 비해 빠르고 작은데도 포탑은 두껍고, 거기에 125밀리 자동 포를 장진한 견실한 탱크. 그런데 걸프전에서 대 참패를 당한다.



*녹다운 T-72, 이라크 전 베스트 포토 중 하나다. 출처: flickr.com



완전 참패였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소련 기술진들은 대폭 업그레이드시킨 T-80이나 T-90, 또 T-95도 내놓는데, 명명법은 변하는 게 없었다. T 자 뒤에다 밋밋하게 숫자만 바꿔 붙일 뿐.


물론 중간에 새로운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T-90MS에 타기르(TAGIR)라는 이름이 보였고, 우리 국군에서 쓰는 T-80U를 대폭 개량한 신형 탱크를 ‘블랙이글’이라 불러, 이게 거의 공식화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식 이름이 되지 못한다.


‘타기르’는 그 탱크를 만든 전차 공장의 소재지였으며, ‘블랙이글’은 개발비 부족으로 무산됐기 때문.



*채택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블랙이글, 포탑 앞부분이 독특하다. 이는 보병의 대전차 미사일이나 그 외 로켓무기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출처: armor.kiev.ua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명명법은 진보한다



물론 탱크의 명명은 개발자와 용병자 마음이다. 단순 숫자나 단순 스펠링으로도 붙일 수 있다. 구별이 쉬우면 되고, 성능만 좋으면 누가 뭐랄까? 그러나 그런 식의 네이밍은 아무래도 감정 이입이 잘 안 되는... 무기질 같은 느낌에, 무기에 대한 친밀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그런 명명법은 권위주의 체제나 독재 국가에서의 단골 방식이었다. 소련은 전쟁 내내 그런 식이었고, 독일은 전쟁 중반까지, 또 일본 육군의 탱크 역시 전쟁 기간 내내였다.


물론 일본 해군도 처음엔 그랬다. 대표적인 전투기. 제로 전투기의 제로, 이게 무슨 멋있는 것 같은데.


“제로는 존재하지 않잖아, 그래서 연합군 전투기가 쏘려면 없는 거야. 그래서 제로.”


뭐, 이런 말도 나오지만, 단순히 숫자의 0에서 나왔을 뿐. 그러니까 99 다음의 100인데, 그게 길어 마지막 숫자 0을 채택한 것뿐이다.


그걸 연합국에서 부른게 제로. 그런데 제로 전투기를 얘기하려고 하면, 진짜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 국민이나 대다수 장병들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항모 탑승원은 알았겠지만)고 한다. 일본 전쟁 지도층은 제 전투기를 국민한테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시종일관 ‘해군 신형 전투기’라고만 발표했으니까.



*제로 전투기. 단점이 많으나 어쨌든 격투 전투기라는 강력한 캐릭터는 있었다. 출처: goodsjapan.com



자유국가일수록 무기 이름이 다양하고 화려하다



대표적인 민주국가이면서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을 보자. 탱크에도 제식 명칭 외에 각자 이름이 다 있다. 영국은 숫자나 스펠링 없이 등의 제식 명칭 없이, 아예 화이어플라이, 처칠, 센츄리언, 코메트(혜성) 등 그런 이름들이 다이렉트로 제식명이다.


전투기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제로 전투기를 갖고 나올 때, 미 해군은 지옥의 고양이 헬캣, 야생의 고양이 와일드 캣, 그리고 에어로 코브라와 버팔로, 십자군의 기사 크루세이더로 맞서 싸웠다.


유럽에서도 독일의 ME109, FW190과 싸운 건 스핏트화이어와 허리케인이었으며 무스탕, 썬더볼트(벼락), 라이트닝(번개)이었다. 폭격기로는 나치 하의 유럽 대륙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리버레이트(해방자)와 플라잉 포트레스(하늘의 요새).


그런 이름이 맘에 들었는지, 독일도 탱크 쪽으로는 중반부터, 네이밍을 바꾼다. 1, 2, 3, 4 호 탱크처럼 줄줄이 숫자만 붙이다가, 5호 탱크에 가서 그제야 판테르, 표범을 붙였고, 그다음 6호는 티게르, 타이거라 하지 않았던가?


공군은 훨씬 늦었다. 유럽 대륙에 황혼이 내리려 할 때, 새 방식의 네이밍을 시작한다.


제트 전투기 Me 262에 이름이 붙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2개다. 전투기 타입엔 슈발베(제비), 전투폭격기한테는 슈투룸 포겔(폭풍을 불러오는 새).



*황혼의 하늘로 날아올랐던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 슈발베. 출처: wikimedia.org



3만 대 이상으로 전투기 역사상 가장 많이 만들어진 걸작 Me109에는 시종일관 어떤 별칭도 없고, 메셔슈밋트보다 더 킬러 본능이 뛰어난 Fw-190에도 다른 공식적 이름이 없어, 그냥 이렇게 불리기도 했다.


‘도살 새’라고. 가만 이건 연합군 파일럿들이 붙여줬나? 부처 버드.


그렇다면 이제 우리 대한민국으로 잠깐 옮겨와 보자.



국군 탱크도 제식 번호 외, 이름이 붙는다



우리 육군도 예전 권위주의 시대의 탱크 이름들은 평면적이었다. 물론 우리 밀리터리 팬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듬직했지만... 예전의 M-48A5K와 국산 탱크 K-1, 그리고 개량 형 K-1A1처럼 스펠링과 숫자의 나열이었다. 


그러다 K-2에 가서 변한다. 흑표라는 멋진 이름이 붙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명명법이라 생각한다. K-2 블랙 팬서, 흑표.



*한국의 산하에는 검은 표범이 산다. k-2 블랙 팬서. 출처: tanks-encyclopedia.com



외국의 전차 마니아들도 이 ‘블랙 팬서’라는 이름에 호감을 갖는 거 같다. 느낌이 팍 오기 때문이다.


소련 역시 명명법을 바꿀 생각을 한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듯,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2015년이다. 모스크바 광장에서 벌어진 ‘대(對) 독일 전쟁 승리 기념일’ 퍼레이드. 러시아의 신형 탱크가 나온다. 블랙 이글과 T-95라는 차세대 탱크의 실패 이후, 새로 내놓는 뉴 페이스다.



21세기의 러시아 신형 탱크



소련 전차는 항상 마이너 체인지였다. 오랫동안 버섯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태(서양 탱크 전문가의 말이다)의 포탑은 그 전통이 꾸준히 유지되었고. 필자는 이걸 냉면 그릇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표현했는데, 이 날은 형태와 결별을 고한 신형 포탑, 신형 차체의 탱크였다.


또 하나 새로운 게 있었다. 명명법에서 완전 달랐다는 것. 정말이지 이름조차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T-14 아르마타(Armata)



*아르마타. 출처: dailymail.co.uk



T-14라는 건 제식 화 결정 시기가 2014년인 듯, 그럼 '아르마타'라는 건?


‘대포’였다. 러시아 전쟁사에 나오는 강력한 대포 이름. 우리나라로 치면 비격진천뢰나 조선 함대의 천자포나 지자포 같은 거? 그들의 본격적 첫 네이밍으로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나, 한 편으로는 꽤 색다르면서 그럴듯한 것 같다.


그러나 네이밍만이 아니었다.


전투력. 소련은 자신한다. 아르마타의 설계 목표는 다른 게 아니었다고.


“아브람스키를 잡는 것!”


당연히 아브람스키는 러시아에서 얘기하는 에이브럼즈. 걸프전을 그들은 잊을 수 없다. T-72에게 수모를 안겨, 러시아 제 탱크의 평가를 완전 바닥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던가? 그게 바로 미국의 M-1 아브람스키.


그 아브람스키 킬러가 나온 것이다. T-14 ‘아르마타’라는 새 이름을 달고.





(세계 각국의 탱크 명명법 - 5부작 완결.)





김은기의 커피 테이블 토크



*제공 @snaparker


'세계 각국의 탱크 명명법'


이제 소련 편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한다. 사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시리즈였다. 스웨덴의 S-탱크 때문에 글이 시작된 건데, 쓰다 보니, 이왕이면 전 세계를 한 번 다뤄보자 하는 마음으로, 부족한 데로 여기까지 온 같다.


그런데 쓰는 동안, 약간 ‘드라이한’ 마음으로 임했다고나 할까? 드라이하다는 건, 시리즈 자체가 네티즌들한테 ‘포퓰러’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서다. 때로는 포퓰러와 관계없어도 써야 될 게 있으니, 그래서 그걸 감수하자는 생각.


사실, 마니아가 아니라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 소련의 KV 탱크에서 KV가 클리멘티 보로시로프인지 뭔지, 그리고 요즘의 이슬람 국가도 아닌데 IS인지 스탈린 이름의 탱크인지... 그러나 일단 세계 각국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니, 여기까진 와야 했고, 그래서 소련 편까지 쓰게 된 거 같다.


물론 빠진 나라도 있다. 프랑스와 체코, 일본 등이다. 아무래도 글의 양이 오버하는데다(그래서 항상 고민이다), 또 이름들이 평면적이고, 흥미를 끌만 한 게 적어서.


프랑스는 제조회사에 번호를 붙여 왔을 뿐이다. 그러다 처음으로 그런 질서를 깬 게 AMX 56 ‘르끌레르’ 걸프전에도 참가한 프랑스의 메인 배틀 탱크. 물론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전망이다. 차세대 탱크 개발에 대한 소식이 프랑스에서 흘러나오질 않아서다.


그런데 '르끌레르‘의 의미는?


제2차 대전 때 파리 탈환에 앞장섰던, 자유 프랑스 기갑 부대 지휘관으로 알고 있다.




*진격의 르끌레르 출처: nationalinterest.org



그리고 체코 쪽은 단 2 종류로 제식 화(制式 化)년도가 이름 그 자체인데, 그중 하나 38(t)은 경 탱크로서 걸작이라 독일 기갑부대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주제가 명명법이라 역시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일본 탱크 역시 체코와 명명법이 같다. 햇수가 정식 이름이다. 그 게 지들 일본의 독자적 햇수이지만. 또 기존에 써 둔 ‘일본 전투기 이름’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생략했다.


이제 커피 테이블 토크 끝 부분. 그래서 마무리를 하는데 마침 요 근래 재미있게 본 TV 프로가 있어, 그걸로 하려 한다. 알쓸신잡이라는 프로. 그걸 약간 틀어 알쓸밀잡, 알아두면 쓸 데 있는 밀리터리 잡학으로 봐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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