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독일은 제2차 대전에서 왜 패배했나? (4부) - 7가지 대(大) 실책
역사가들은 1939년 9월 1일을 전쟁의 시작으로 본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그 좋은 가을이 시작되려는 9월 첫째 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첫째 날이 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 후 영국이 먼저, 뒤따라 프랑스가 선전 포고를 한다. 병력을 원 출발점으로 돼 돌리라는 요청을 독일이 거부했기 때문.
이젠 전쟁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믿는 게 있었다.
"폴란드는 버틴다."
독일 군을 패배시키진 못 하나, 쉽사리 당하진 않을거란 믿음. 폴란드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제법 큰 편이다. 그리고 군사적 전통도 화려하고 병력도 많다. 바로 그 유명한 창기병의 나라 아닌가?
*1683년, 오스만 터키 15만 대병력이 유럽을 침공 시, 폴란드의 이 ‘날개 달린 창기병’들은 대항마로서 그 선봉에 선다. 지금도 폴란드 전차 등에는 이 날개 형상을 그려 넣은 걸 볼 수 있다. 이름은 윙드 헤자. 출처: pinimg.com
“더구나 폴란드는 우리가 참전한다고 했으니, 기세가 더욱 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애국심 강한 폴란드 군이 강력히 버티고, 반대쪽에선 영국과 프랑스 군이 액션을 취한다. 그래서 충분히 해 볼만 하다는 생각. 허나 전혀 아니었다. 폴란드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지리멸렬, 수세에 몰렸기 때문이다.
폴란드 장군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몰랐다. 기계화 부대가 속도전으로 들어오고, 하늘에선 급강하 폭격기가 주요 지점에 대해 내리꽂는 데, 아직도 군대 내에 창기병 부대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어떻게 독일을 당해내나?
*스투카! 지금 500킬로그램 폭탄 투하! 출처: ytimg.com
총알 없는 전쟁, 8개월
물론 폴란드도 기갑 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매우 허약했으며 숫자도 적었다. 탱크를 보유했으나, 영국의 수출 형 경량 탱크와, 탱크가 아닌 탕케테(Tankette)라는 게 있었다. 억지로 번역하면 미니 경 탱크?
*폴란드의 탕케테. 일반 승용차보다 작다. 일본이 중국에서 그 비슷한 탕케테를 사용한 적도 있으나, 유럽에선 금방 사라진다. 출처: derela.repblika.pl
폴란드는 그런 경 탱크로도 용감히 저항했으나, 연합국의 기대와 달리 일찍 무너진다. 더구나 폴라드는 독일 기계화 산단의 진격이 용이한 평평한 들판의 나라.
한 달 정도에 폴란드 항복! 또 한번 히틀러의 야망이 이뤄진 것이다. 재무장 선포! 라인란트 진주,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침공! 그리고 폴란드 침공 후 폴란드 군 궤멸!
독일 국민과 히틀러로서는 매우 신나는 시간. 그런데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전쟁이 아닌 전쟁 상태
영국과 프랑스가 병력을 금방 독일 국경 쪽으로 진경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프랑스 국경을 넘지 않았다.
서로가 미룬다. 어느 쪽도 움직임은 없었다. 본격적 전쟁이라는 건 진절머리 나는 거라는 걸, 1차 대전 때의 참호전에서 익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무수한 희생과 함께, 더 나아가선 민족과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 그래서 움직이질 않는다.
물론 독일은 서방 침공에 대한 날짜를 정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날씨가 나쁘고, 그 해 겨울은 또 어느 때보다 천후가 불량했다. 거기에다 히틀러의 주저함이 합쳐져 침공은 계속 연기된다.
무려 29번에 연기된 날짜가 8개월! 그동안 무수히 작전 회의만 했을 뿐이다.
전쟁은 시간의 문제, 수많은 병력들이 독일에서부터 서쪽의 벨기에 국경까지 이제나 저네나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선수를 친 것은 히틀러였다.
그러나 서방 침공이 아니다. 덴마크를 통해 북쪽 노르웨이에 대한 침공이다. 공군과 해군, 낙하산 부대를 이용한 신속한 공격. '빠른 시간 안에 점령하자!, 이젠 피할 수 없게 된다!' 드디어 명령을 내린다.
“프랑스로 쳐들어가라!”
침공이 연기되고, 숱하게 뜯어고쳤던 계획은 이때 공을 세운다. 완성도가 매우 높아졌기 때문.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영국, 프랑스의 싸움, 누구라도 쉽지 않을 싸움 같았다. 더군다나 1대 2. 사람들은 밀리는 쪽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독일이다.
“재무장 시작한 지가 언제야? 겨우 4년 전이잖아?”
그런데 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영, 불 연합군의 참담한 패배.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마지노선을 믿고 벨기에 쪽에다, 주력을 포진시키고 있던 연합군은 황당한 소식을 듣는다.
“뭐 어디? 아르덴느로 온다고?”
“거기가 어딘데?”
그 숲을 통과한 탱크들이 쾌조의 전진을 계속, 낫으로 쓸어버리듯 무인지경 자기네 뒤쪽으로 진격해 오고 온단다. 그러니까 벨기에 쪽에 올라가 있던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뒤쪽!
*프랑스 시가지를 통과하는 독일 2호 탱크. 출처: theatlantic.com
선봉은 5개 기갑 사단! 그리고 프랑스는 이 기갑사단들을 막을 방어선이 없다.
덩케르크를 항하여!
얼마 뒤 뮤즈 강 돌파와 스당 함락! 이른바 독일군 ‘바다로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탱크의 천재라는 구데리안 장군의 3개 기갑사단들을 필두로 프랑스 국토를 가로지르면서, 대서양이나 영국 해협 쪽으로 맹렬히 진격하는 상태. 이제 프랑스는 절단이 돼 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덩케르크 사태는, 벨기에 맨 서쪽에 있던 영, 불 연합군, 3~40만 명이 어떻게든 프랑스 땅을 탈출해 아래쪽 항구 덩케르크로 죽어라 도망치면서 생겨난 일이다.
*출처: thesun.co.uk
제 몸 하나 살아, 바다를 건너가겠다는 게, 일생 목표인데 어떻게 중장비들을 가져갈까? 특히 영국 원정군은 대륙으로 가지고 왔던 마틸다 탱크를 비롯해 여타 장비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때 처칠 수상이 한 말.
“이제 우린 박물관에서 무기를 가져와 싸워야 했다.”
진짜 그랬는지 모르나, 영국이 자기네 박물관을 뒤지고 다니는데, 독일은 여기저기 버려진 영, 불 연합군의 탱크 등을 살피고, 또 프랑스 무기 공장에 들어가 쓸 만한 게 없나? 조사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히틀러의 완벽한 승리!
히틀러 날씨
당연히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신(神)과 동격이 된다. 오죽하면 독일에서 햇빛이 찬란하고 공기 중에 습도가 없는 상쾌한 날을, 국민들이 이렇게 불렀을까?
“완전 히틀러 날씨야”
*출처: holocaustresearchproject.org
정말이지 거기까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독일은 서부 유럽 모든 곳을 점령했고, 점령지역 파리의 독일 장병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에펠탑과 개선문을 구경하고 다니는 제3 제국의 가장 좋은 날들.
그때가 1940년, 선전상 괴벨스가 한 말인가?
“승리만큼 좋은 선전이 없어. 그거면 다야.”
꼬이기 시작하는 히틀러,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성경에는 좋은 이야기가 많다. 비록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도 새겨둘 말.
“섰다고 할 때 조심하라”
눈부신 성공을 이룬 1940년의 그다음 해, 1941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흡족했던 1940년을 보내고 난 뒤의 히틀러는, 그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생각은 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새해 일찍부터 전략적 무리수를 두게 될 거라는 상상... 만약에 히틀러 인생에 이 1941년이라는 게 없다면, 그는 두고두고 성공한 지도자와 승리자로 남았을지 모른다. 아니, 언젠가는 몰락을 하겠으나 그 과정에서의 길은 매우 롱런~ 했을 수도 있었다.
제2차 대전에 대한 책을 쓸 때, 1942년 까지는, 히틀러와 독일에게 눈부신 승리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1943년은 처절한 전투의 장이 벌어지는 해다.
그해 벽두부터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제 6군 전멸, 하루코프 전투, 그리고 거대한 전투 쿠르스크, 그리고 북 아프리카 독일군의 운명을 가르는 튀니지 전투 등.
결국 1944년부터 패배를 향한 드라이브가 계속되고, 1945년 봄에 결국은 멸망을 맞이 한다. 그리고 이 멸망의 씨앗들이 뿌려진 게 바로 서부전선 완벽한 승리, 그다음 해인 1941년부터였다.
그만큼 이 해 여러 전략적 결정은, 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결정을 아예 내리지 않던가, 아니면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면 제3제국의 운명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오랫동안 군사를 학문적 차원에서 공부한 고급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였다. 남들을 매료시키는 건 물론, 코어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결정하는 일들은 대부분 오류가 없었다. 또 남들과 달리 수치에도 정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물론 처음엔 누구도 몰랐다. 프랑스를 정복하던 그때처럼, 마냥, 전진, 또 전진이었으며, 승리 또 승리였기 때문에, 독일 군이 가는 곳엔 승리 뿐이라는 생각과 총통 히틀러의 결정엔 어떤 ‘실수’도 없다는 생각뿐.
7가지 군사적 실책의 시작
첫 번째는 1~2월에 나온 실책으로, 롬멜과 군단 병력의 북 아프리카 파견이다.
*출처: warthunder.com
두 번째는 4월의 일로, 독일 군을 발칸 반도 남으로 이동시켜, 그리스 점령과 크레타 공수 침공 작전.
물론 군사적 큰 실책이 아니다. 출혈이 많았으나, 목표로 삼았던 크레타 점령은 성취하니까. 그러나 전략적으로 병력을 대단히 잘못 쓴 예.
*독일 낙하산 부대 공동묘지가 된 크레타 섬 강하 작전. wikimedia.org
그리고 세 번째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실책이었다. 그 해 6월에 실행된 일인데, 다른 실책들은 타격이 있을지언정, 나치 제국 유지에 그리 큰 대미지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 돌이킬 수 없는 대 실책.
발바로사 작전의 발동!
러시아 침공이다.
*전격 작전에 이게 없으면 안 된다. 장갑화 된 하프 트럭. 출처: wp.com
그리고 해가 다 가기 전, 또 한 번 실책을 저지른다. 물론 히틀러가 시작한 건 아니다. 지구 반대 편 태평양에서 일어난 경천동지 할 사태 때문인데 일본의 진주만 기습.
그런데 히틀러는 덩달아 미국에 선전포고 한다.
“뭐? 히틀러가 먼저 싸우겠다고 했어?”
그렇다.
독일이 먼저 했다.
*진주만. 출처: wpengine.netdna-cdn.com
이제 다섯 번째 실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잘못된 결정이다. 여기에서 제 6군, 30만 명이 포위돼 섬멸되는데, 잘만 했으면 6군을 건질 수 있었다. 아니면 절반이라도... 그런데 히틀러는 그렇게 안 한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배패 이후, 심한 트라우마에 빠진다.
“이 전쟁은 이길 수 없을지도 몰라.”
여섯 번째 실책. 이것은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실책이긴 하다. 동맹국들 전투력이 형편없었다는 거.
그들은 군사력에 있어서 일류는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 국토의 크기와 군사력을 가졌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강요도 있었으나, 전쟁에서 이길 경우, 얻는 게 많다고 생각해 참가한 것이다.
*루마니아 국산 전투기, IAR-80/81 전투기, 자기네 유전을 공습하던 미국 B-24 ‘리버레이터’ 중폭격기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출처: wp.scn.ru
그런데 이 동맹국들은 짐이 되며, 결국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실책. 우리가 ‘발지 전투’로 알고 있는 ‘아르덴느 대 반격’이다. 히틀러는 여기에 2개의 기갑 군과 보병을 위주로 한 1개 군 합쳐, 가뜩이나 병력 부족의 상태에서 대군을 투입한다.
1개 기갑군은 오더 상으로 거의 10개의 기갑 사단을 지휘 하에 둔다. 물론 당시는 전쟁 후반기라 탱크 정수(定數)가 많이 부족하다 해도, 정말 대 병력이다.
독일 국경 가까이 진격하는 연합군을,
“일거에 밀어 붙어, 다시 바다로 집어넣겠다!”
이런 일념으로 동원된 대 병력이자, 히틀러 최후의 대 도박. 그런데 이 야심 찬 그만 좌절되지 않았나?
*세계 최강의 탱크 쾨히니 티게르, 킹 타이거다. 그러나 버려져 눈에 덮여 있다. 출처: quoracdn.net
그리고 얼마 뒤, 소련군은 베를린 동쪽에서,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서쪽에서 밀려온다. 천년을 간다는 제 3제국이 전쟁 발발 단 6년 만에 끝난 것이다.
더 오래갈 수 있었다.
히틀러 집권 후, 독일은 혼란기를 지나 놀라운 경제 발전이 이뤄지고, 또 영, 불의 무기와 비견되는 무기의 양을 급속히 늘리고, 따라잡을 만한 것들도 연구, 속속 내놓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폴란드 침공을 몇 년 더 늦췄으면, 전쟁 발발기보다 훨씬 더 견교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발발한 전쟁이라 해도, 잘만 하면 유럽의 정복자로서 더 오래갈 수 있었다. 지금 얘기한 7 가지의 전략적 대 실책만 없었어도...
(4부 끝)
김은기의 커피 테이블 토크
*제공 @snaparker
제2차 대전의 전쟁터는 전 지구적이었다.
더욱 특이한 건 본격적인 입체적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인류 전쟁사가 대부분 평면적인 전쟁터에서 싸움을 벌여온 데 비해.
먼저 일어났던 제1차 대전 때 내연기관이 등장하긴 했으나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은 이 내연기관의 눈부신 발달로 인해 전투 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반면 먼 거리도 빠른 시간 내에 대쉬, 접근이 가능했다.
그래서 포병까지도 자주화가 되는 등 기동전, 속도전이 됐으며, 또 하늘과 바다 속도 매우 위험하면서 결정적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대서양을 항행하는 영국의 수송선단은 바닷속 u-보트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하늘 위를 열심히 살펴봐야 했다.
대서양의 '악성 전염병'이라는 독일의 FW-200 '콘돌’이 언제 날아와 어뢰를 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 먼 유럽 대륙, 나치 점령 하 프랑스 비행장에서 뜬 4발 장거리 대형 초계기.
*상선 사냥꾼 ‘콘돌’. 출처: 1000aircraftphotos.com
그런데 ‘콘돌’이 몇 시간을 바다 위에서 돌아다니는가?
14시간이다.
제2차 대전은 이렇듯 전쟁 거리와 바운더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평면적 차원이 아닌, 격렬하기 이를데 없는 3차원적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각 나라의 고위 지휘관들은, 얼마 전까지 빈발했던 국경을 접한 싸움을 떠나, 세계 지도가 항상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 동시에 작전판 위의 ‘지구의’를 보기도 하는, 즉 ‘대 전략(grand strategy)’에 대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
그런데 1차 대전 때 일개 사병에 불과했던 히틀러는, 과연 대단히 스케일 업 되면서도 입체적 전쟁에 필요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까? 또 거기에 적절한 대 전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의 명령을 받는 강건 하면서도. 전투적 효율성 최고의 독일 군은 어디까지 싸울 수 있었을까?
*출처: haniootika-nea.gr
필자는, 추위가 계속되는 이 저녁,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한 번 생각해 본다.
수많던 전투와 그 수만큼 획득한 눈부신 성공 뒤, 이내 몰락의 길로 내몰리고, 결국 허무한 패배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히틀러와 독일.
그들 승리의 전략과 패배의 전략 중에서. 특히 패배 쪽 7개를 헤아려, 한번 같이 분석해 보자는 생각.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즐기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좋은 커피 타임, 즉 ‘지적인 대화의 만찬(intellectual banquet)’같은 게 되길 바란다... 비록 만찬이 커피로 바뀌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