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성 히어로(Unsung Hero)
유명하거나 화려하진 않으나, 뒤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래서 그 조직이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
허나 정작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는 가지 않는다.
언성 히어로다.
축구 감독들은 이런 선수를 제일 좋아하는데, 그런 선수 중엔 ‘박스 투 박스’ 형이 많다.
자기 페널티 박스에서 상대편 페널티 박스까지, 온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선수.
동부전선의 언성 히어로
전쟁터도 마찬가지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싸웠던 동부 전선,
소련은 결국 베를린까지 밀고 들어 가 승리를 거뒀다.
전차전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던 곳이니, 이때 T-34 탱크를 수훈갑으로 꼽는다.
누가 뽑아도 ‘전차 백년사’ 최고 탱크는 바로 그 T-34다.
그런데 언성 히어로가 그 뒤에 있었다.
SU-76이다.
*언성 히어로, SU-76. 출처: wikipedia
무려 1만 4천 여 대가 생산돼,
거의 모든 전역에서 피의 전투를 감행했던
비교적 경량의 대(對) 전차 자주포.
여기서 SU라는 건 '사모코드나야 스타미나',
러시아 어로 대포를 장착했다는 의미.
따라서 SU-76이라 하면,
76.2 밀리 포를 장착한 탱크.
*동부 전선의 언성 히어로 SU-76 출처: ak0pinimg.com
그런데 세분하면,
대전차 자주포라 하기도 하고 또 누군 돌격포라고도 한다.
멀티 플레이어 SU-76
그러나 멀티 플레이어다.
대전차 자주포.
돌격포.
그리고 야포를 장착한 자주포.
첫 번째는 당연히 독일 기갑부대와의 싸움이다.
76밀리 포는 관통력이 상당히 우수하다.
그래서 티게르를 제외한 모든 독일 탱크들을 관통할 수 있다.
물론 판테르까지 조금 까다로워 되도록이면
정면에서의 싸움을 피해야 하나,
어쨌든 작고 기동력이 있어,
가까운 거리나 옆구리 쪽으로 돌면 해 볼만 하다.
*SU-76 전투 교범에는, ‘타이거와의 정면 대결은 피한다.’라고 돼 있다. 출처: cdn.wallpapersafari.com
그 외 대부분의 독일 탱크? 명중시키면 그대로 격파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진가가 나타난다.
돌격포 임무다.
돌격포가 뭔가?
보병과 함께 돌격하는 탱크. 이게 돌격포다.
독일의 기갑 천재 구데리안이 창안한 새로운 장르의 탱크.
그래서 제2차 대전 이전까지 없었던 무기다.
*나치 독일의 신무기 3호 돌격포. 포신이 짧은 건 이유가 있다. 보병 지원용이기 때문. 출처: wikipedia
보병들은 언제나 위험하다.
인류 전쟁사 5천 년 동안 가장 많은 전상자가 나오는 게 이들이다.
그리고 제 1처 대전의 경험에 의하면,
적이 단단히 지키고 있는 곳, 토치카가 있고, 벙커가 있으며
그래서 거의 요새화 된 곳으로 진격하려면 시체를 무수히 깔아야 했다.
특히 보병의 도살자인 기관총 진지를 습격하기 위한
독일군 슈투름 투루페(폭풍 부대) 같은 게 있었으나,
당연히 사상자 율은 최고.
그렇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구데리안이 혁명을 일으킨다.
대포를 전차에다 장착해
‘돌격 포병’이라는 개념으로
보병과 같이 가게 하는 것.
보병을 노리는 것들을
이 돌격포가 같이 가면서 부셔버린다.
또 건물 안에 숨어 총을 쏴 대면,
이때 돌격포가 그르르... 전진해, 그 건물을 통째로 날려 보낸다.
그러면 뒤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보병이, 기세를 올리며 전진한다.
*이게 돌격포다(독일 3호 돌격포). 보병의 친구이며 보병의 수호자! 그래서 대 탱크 전투는 중요치 않아, 포신이 짧다. 출처: ak0.pinimg.com
그런데 독일의 돌격포는 완전 밀폐된 차체와 포탑이라,
외부 보병과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
이 소련의 언성 히어로는 그게 잘 된다.
포탑이 오픈된 형태이기에 그렇다.
뒤에서 소리를 질러대면,
승무원들이 금방 알아듣는 구조.
*이렇듯 오픈된 포탑, 그래서 포탄 탑재도 쉬웠다. 타미아의 SU-76 모형. 출처: blog.zinnfigur.com
보병들이
“저기 저 왼쪽 언덕에 파시스트 기관총 진지가 있어!”
그럼 승무원들은
“알았어!”
“쾅!”
소련 보병들은 그래서 이 SU-76을 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세 번째가 또 있다.
다른 탱크들한테는 부족한 소질.
3번째 대단한 소질
곡사포 역할도 한다는 거다.
모든 소련 탱크 중, 포신을 비교적 높게 쳐들 수 있으니
그러면 일반 탱크처럼 직사 화기가 아닌, 곡사 화기가 된다.
물론 대구경 포가 아니라, 위력에 제한이 있으나,
그래도 기동해서 가까운 거리의 야포 사격은 위협적일 수 있다.
*견인식 야포 안 부럽다. SU-76. 출처: feralinteractive.com
이러니 동부 전선의 '언성 히어로'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피해가 너무 많았다.
숱한 희생이 있었다.
장갑이 얇아, 앞쪽이 30밀리다. 센티로 하면 겨우 3센티.
그래서 독일의 웬만한 포에는 관통되고,
또 포병 공격에 취약하다, 주위에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지면,
파편들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니.
일반적으로 탱크들은 직격으로 당하지 않는 이상,
곡사포 포탄이 주위에 떨어져도 별 상관이 없다(고막에 이상이 있을까?).
그러나 천정이 없는 오픈 톱.
거기에 또 극악스러운 독일 보병과
척탄병들의 공격에도, 자주 당했다.
옆이나 뒤쪽에서 총으로 긁어봐라.
아니면 수류탄을 던져도 피할 데가 없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자기의 자주포를 이렇게 불렀다.
슈카(Suchka).
민망한 말이나, 러시아 말로 어린 매춘부.
자기 몸을 팔아야,
독일 전차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래서 숱한 SU-76가 파괴됐고,
많은 승무원들이 이 오픈된 자주포 위에서 피를 흘렸다.
*장갑이 얇은 데다 위와 옆은 완전 오픈. 그래서 적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출처: modelsale.com
그러나 생산량은 1만 4천대!
생산량이 많다는 건 간단히 얘기해,
그 무기가 제 값을 한다는 뜻 얘기다.
공장 문을 나온 1만 대 이상의 SU-76은,
동부 전선 곳곳에서 피의 전투를 하며, 베를린까지 전진했다.
대량 생산과 대량 투입 이유는,
중량이 가볍고 사이즈가 작은 편이라 생산하기도 쉬웠고,
원자재도 다른 탱크의 반의반도 안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의 대표적 탱크 T-34는 32톤,
KV 48 톤, 그러나 SU-76은 달랑 10톤.
그런데 펀치력에선 큰 차이가 안 난다.
반동이 쌜지 몰라도,
철갑탄도 충분히 발사할 수 있었으니까.
당시의 동부 전선처럼 공간이 넓고,
전투 차량의 소모가 극심한 곳에선 매우 필요한 무기.
(물론 판테르와 티게르를 만나면, 조심을 해야 하지만)
그런데 한국군이 이 자주포를?
아니 한국군 내에 이 자주포 부대가 있었어?
소련과 무슨 관련이 있어 이 헌신적 슈카를 보유하나?
한국 전 때문이다.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작고 한 방이 있는 SU-76는 소련의 우호국에 대량 보급된다.
그리고는 5년쯤 있다가,
다시금 화약 냄새나는 전쟁터에 등장하는데, 그게 '한국 전쟁'.
이때의 북한 탱크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T-34를 떠 올린다.
그러나 슈카도, 소련으로부터 다량 공급받아
남침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기세 좋게 38선을 넘고,
남한의 산하를 가로지르며 내려오나,
미군의 참전으로 인해 결국 단 1대도 돌아가지 못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당시 북한의 유경수 탱크 여단. 출처: wikipedia.org
전량 모두 격파돼, 남쪽 여기저기 처참한 몰골로 누워 있거나,
아니면 기름이 떨어져 그냥 놔두고 도망갔거나.
그중 멀쩡한 것들은 그냥 회수하고,
조금 손만 보면 될 것들은 수리를 하고.
그래서 이걸 모아 우리 국군 대전차 자주포 부대를 조직한 모양이다.
*설명 글, 한국군이 버려진 SU-76을 보고 있다. 출처: image.tistory.com
SU-76이 원래 차체가 작고 심플한 메커니즘이며, 또 기름도 작게 먹혀,
당시의 우리 국군 수준으로도, 어느 정도 운용이 가능했을터.
그래서 한국 전 당시 미군도 영국군도 없는
유일의 대전차 자주포 부대가 1951년 여름 이후, 국군에 의해 운용된다.
SU-76 Former Operators
Afghanistan
Albania
China
Cuba
Poland
Nazi Germany – Captured from Russian Forces in WW2
North Korea
North Vietnam
Romania
South Korea – Captured from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Soviet Union
'TankNutDave.com'이라는 사이트에서 나오는 슈카 관련 글.
슈카를 운용한 나라 중에는 나치 독일과 한국이 있는데.
특히 '한국은 북한한테서 뺏어 사용했다.'라는 게 보인다.
*버려진 SU-76과 국군(미군이라는 설명도 있다). 출처: wikimedia.org
애석하게도 사진은 없다.
애석하게도 한국 전 이후의 M-56 스콜피온 마냥,
사진 한 장 남아 있는 게 없는 듯 하다.
버려진 사진이야 많은데...
*한국 소년들이 SU-76 위에서 놀다가, 사진을 찍는다니까 늠름하게 포즈를 잡는다. 출처: ak0.pinimg.com
물론 부대가 길게 유지될 수는 없다.
후속 지원의 문제다.
가장 중요한 포탄의 공급이 어렵지 않겠는가?
ZIS-3라는 이 주포는 76.2밀리로 당연히 소련제.
엔진도 소련제라 고장 나면 고치기 어렵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부대 유지가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사진이라도 좀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부대의 창설과 운용, 전투 기록 등의 기록도.
이것들은 후속 지원과는 상관없는데, 남겨진 게 없다.
오히려 외국 여러 사이트에서,
한국군의 SU-76 사용에 대한 글만 발견될 뿐.
위키피디아의 SU-76 항목에도 이런 글이 뚜렷이 보인다.
In the Korean War. A small number of SU-76Ms were captured and used by the South after the landing of Incheon.
(한국 전 때 적은 수량의 SU-76이 노획되어, 한국군에 의해 사용됐다.)
우리에게 있어서 SU-76의 일.
참 아깝지 않은가?
남침에 사용했던 소련제 대전차 자주포를 노획,
그걸로 기갑 부대를 만들고, 인천 상륙전 이후 전투에 사용했다는 사실.
물론 그 기간이 짧고,
이렇다 할 만한 전투 횟수가 적었을 거라 유추되나,
어쨌든 흥미로운 일이다.
남침 초기, 북한군 기갑부대의 일방적 승리라는
인상을 조금은 희석시킬 수도 있다.
저들 기갑 쪽은 국군에 대해, 지금도 엄청난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겠는가?
탱크 몇대로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 방어선조차 붕괴시켰으니까.
그래서 사진이라도 한 장 남아있다면,
(당연히 오픈 톱이기에, 국군이 여럿 보이게 돼 있다.)
그 우월감 꼭대기에 자리 잡은 부대.
‘근위 서울 유경수 105 탱크 사단’을 머쓱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야, 니들은 남반부 땅크, 노획해 만든 부대 있어?"
"우린 니들꺼 노획한 기갑 부대가 있었다고."
커피 테이블 토크
@snaparker
제2차 대전의 숱한 탱크 중,
필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게 있다.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다.
형태가 독특하고 멋진데, 거기에다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사진이 없다.
소련의 '돌격 거포' SU122i.
독일 탱크 차체에
소련 군 대포를 얹은 돌격 거포.
*색칠하기 전의 미완성 모형 SU122i. 사진은 발견 안 돼도, 이렇게 모형으로는 발매됐다. 출처: farm8.staticflickr.com
구데리안이 창안했다는 쇼크 무기 3호 돌격포.
*독일군 3호 돌격포, 꼭 무슨 방탄 거북이에다, 짧은 곡사포를 집어넣은 거 같다. 출처: armchairgeneral.com
이를 동부전선에서 다수 포획한 소련은,
차체에다 자기네 122밀리 대구경 곡사포를 장착한다.
원래의 75밀리 소구경에서 122밀리로!!
광폭 업그레이드된 하이브리드 형,
소련판 대구경 ‘돌격포’.
자세한 설계도면과 관련 자료들이 충실히 남아 있는데,
사진은 단 1장도 없다.
그런데 최근 발견됐다.
딱 한장.
*선명하진 않으나 이게 바로 환상의 SU 122i, 여기에서 i는 느낌표가 아닌 러시아 어로 ‘외국 거’라는 뜻. 출처: farm7.static.flickr.com
전 세계 AFV들은 감동.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70년 만에 발견되나?”
그렇다면 언젠가 국군 기갑부대 SU-76이나,
스콜피언 사진도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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