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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ikimedia



히틀러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구적(仇敵)이었던 옛 연합국과의 한판 대결은 결국 벌어진다.”


“그들은 독일이 점점 강해지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것이며, 우리도 복수를 해야 되니까.”


“따라서 전쟁은 결국 터진다. 안 터질 수가 없다.”


여기에 단서가 붙는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1943년이다!



히틀러는 그래서 장군들과 측근에게 자주 말했다. 1943년 즈음이 그 전쟁의 시작일 거라고... 그런데 햇수를 영~ 잘 못 예측한 것이다. 그보다 4년 먼저인 39년 초여름에 터졌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39년 9월 첫날. 그런데 히틀러가 예측한 그 햇수 말고 역사에서의 진짜 1943년엔 어떤 일이 일어났나?



가장 격렬했던 1943년도 전투들



42년 초겨울 쯤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해를 넘기면서 43년이 됐고, 포위망 속에서 절망의 분투를 계속하던 독일 제 6군은 전멸된다. 1개 군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거의 10개 사단 정도의 병력인데, 히틀러로서는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지는듯한 고통의 패배였으리라.




*독일인 숙명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출처: guim.co.uk



그뿐인가? 이어 벌어진 처절한 하르코프 공방전(만슈타인 매직이 있었던 바로 그 전투)과, 단일 전투로선 사상 최대인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졌던 해가 언제인가? 바로 그 해다. 아마 제2차 대전사를 쓰는 저술가가 1943년도를 쓰고자 한다면, 페이지가 가장 두꺼워지며, 그 전투의 격렬함에 몸서리치자 않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43년에는 거대한 또 하나의 전투가 있다. 북 아프리카에 벌어진 튀니지 전투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사막으로 들어온 이래 가장 큰 전투.


티거 탱크가 최초로 참가하기도 했으나, 지칠 대로 지치고 병참선이 거의 끊긴 추축국이 패배, 북 아프리카에서 궤멸된다.


그런데 히틀러는 43년에 총알이 처음으로 교환될 거라고 생각했으니, 햇수를 착각한 것이다.


그 얘긴 또 이렇게 된다.

“전쟁 준비 기간을 4년이나 빠뜨렸어.”


그렇다. 그 햇수만큼의 준비 기간이 사라진 셈.


더구나 독일 군에 있어서 그때의 1년, 1년은 다른 해와 많이 다르고, 또 연합군들의 1년과 엄청나게 다르다.


1차 대전의 패배 이후, 17년 만에 시작된 재무장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차근차근 전투기와 군함, 탱크들을 만들어, 각 부대에 장비시키는 1년, 1년 아닌가? 그런데 그 햇수가 무려 4년이나 쑹텅 없어져 버린 것이다.



*1938년, 데이 오브 베르막트(독일 육군)의 날에서의 히틀러와 열병. 병사들 뒤 쪽에 경 탱크 부대가 보이는데, 1년 뒤, 진짜 전쟁이 터진다. 그리고 저 병사들 중, 탱크 병 중 반 정도가 살아남았을까? 출처: alamy.com



그런데 누가 잘라 버렸나? 히틀러 그 자신이다. 그는 예견을 잘 못 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일찍 전쟁을 일으키니까.


세상에는 이렇게 사람 마음대로, 사람의 계획대로 되는 게 많지 않다. 더구나 상대성이 강한 케이스, 전쟁이라는 건 더더욱 그렇다.



U-보트 함대가 그렇게 작았던 이유



그렇다면 이제 이해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크릭스 마린(독일 해군)의 U-보트 숫자가 왜 그리 적었을까? 하는 의문. 전쟁이 시작됐을 때 60척을 넘기고 있었고, 그중 바다에 출격해 있는 건 겨우 20여 척이었다는 사실이.


만약에 39년이 아니고 43년도에 전쟁에 들어갔다면, 3백 척은 아니라 해도 근접한 척수를 되니츠 제독은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로 영국의 해양 통상로를 그냥 공격했다면, 처음부터 판세를 압도적으로 가져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많은 기여했을 것이고....... 미국도 참전하지 않았을 때이니까(놀랍게도 미국은 전쟁 발발 거의 2년 뒤, 참전한다).


그런데 U-보트 들은, 상당히 적은 숫자로 영국과의 싸움에 나선다.



*출처: blogspot



육군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막트(독일 육군)도 준비가 덜 돼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트랙터라는 이름을 겨우 빼고, 판저(탱크)라 붙여진 1호, 2호 경 탱크를 만들어 장비한 게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1, 2호를 대체할 중(中) 전차 3호가 부대 편제에 들어가 훈련 중이며, 3호를 도와줄 어시스트 4호 전차도 막 배치가 시작될 때, 그때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했으니까.



*3호 중 전차, 이때에 가서야 독일 기갑부대는 영국과 프랑스와 견줄만한 물건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출처: pinimg.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신생 기갑부대는 프랑스를 그냥 유린해 들어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다. 정말로 놀라운 일.


사람들은 독일 기갑부대의 준비기간이 짧았고, 탱크의 질과 양에 있어서 연합국한테 뒤지고 있었다는 걸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독일 탱크들은 숫자도 많지 않았고, 질에 있어서도 결코 우위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구데리안’ 같은 기갑전의 천재가 있었고, 총지휘를 했으며 탱크라는 무기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뛰어난 전법을 창안한다.


전격전이다.



*전격전의 창시자, 하인츠 구데리안 출처: blogspot.com



전격전의 완성



탱크를 집단으로 사용해 민첩하게 돌격하며, 그 뒤를 받쳐주는 동등한 스피드의 기계화된 부대와 보병들을 두고, 또 이때 하늘에서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가 적의 ‘스트롱 포인트’를 정밀하게 폭격, 날려 버린다.


이전의 전쟁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빠른 스피드로 방어선을 붕괴시키며 돌파, 적 후방까지 깊숙이 침투가 가능하고, 그럼 선봉 기갑부대의 뒤쪽에 남아 있던 적의 숱한 방어 부대들은, 대 혼란에 빠지면서 결국 궤멸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새로운 기갑전 방법.


그리고 독일은 그 이론을 폴란드에서 1차 시험을 해 본 뒤(물론 완성된 전격전은 아니다), 그다음, 마지노선 서쪽 맨 끝 아르덴느 숲에서 실전 발동시킨다. 5개 기갑 사단의 숲 속 돌파였고 상식을 깬 비상한 아이디어였다. 동시에 허를 뚫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설마 숲 속으로 올까? 이런 생각으로 방어선을 얕게 친게 그 숲속 맞은편이었으니.



*아르덴느 숲 출처: cromwell-intl.com



현대의 5~60톤 정도 탱크들은 통과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시의 기갑부대 주력은 2호 탱크였다. 기관포를 장착한 8톤 정도 작은 사이즈. 물론 독일이 징발한 체코 제 탱크들도 그 비슷하다.


그래서 아르덴는 숲에서의 작전은 보기 좋게 성공하며, 프랑스 본토로 그냥 들이닥친다. 물론 프랑스 쪽은 경천동지, 놀라 자빠졌고. 독일군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의 전쟁 시작’이란 사실을 덮고, 또‘히틀러의 무모한 발발’이라는 것도 덮으며 전쟁사의 신화가 되는 순간이다.  




루프트바페(독일공군)도 준비가 덜 됐다



역시 재무장 기간이 짧았으니까. 그러나 루프트바페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래도 3군 중 가장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고 할까? 짧은 기간 안에 두 가지의 뛰어난 기체를 개발해 놨으니까.


그것은 메셔슈밋트 Me-109 전투기와 다른 하나는 급강하 폭격기 융커스 Ju-87 스투카.



*메셔슈밋트 시리즈 중, 초기 형인 E형, 파일럿들은 오히려 이 초기 타입을 더 좋아했다. 출처: i49.servimg.com



*전격작전 시 하늘에서 내리꽂는 공포의 사신(死神) 스투카. 출처: redbubble.net



그러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건설할 수 있는 게 있었다.


그것은 폭격기 부대.


당시의 일선 폭격기 도르니에르 DO-17이나 하인켈 HE-111 등은 원래가 여객기였으니까.



*Do-17, 모양새가 터프한 폭격기이기는커녕, 거의 여객기다. 고속이라는 게 붙지만... 출처: wp.scn.ru



물론 융커스 Ju-88이라는 전투, 폭격, 다용도기가 나왔으나, 어쨌든 그것도 경폭격기.


따라서 독일에는 대 탑재량의 강력한 중폭격기가 없었다. 프랑스를 항복시킨 후, 독일 공군이 영국 상공으로 대거 들어가 펼친 그 유명한 ‘배틀 오브 브리턴’에서도 악전고투하다, 결국 실패한 이유 중 가장 큰 걸 꼽으라면 바로 그 부분.


대량의 폭탄 탑재량과 긴 항속력을 가진 4발의 중폭격기가 있었다면, 프랑스 비행장에서 바로 코앞의 영국으로 날아가, 공업지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는데, 독일은 시종일관 쌍발 경폭격기들로만 편대를 구성, 도버 해협을 건너게 했다. 폭탄도 방어무장도 항속력도 모두가 충분치 못한 기체만으로.


괴링을 비롯한 공군 지휘부의 전략 폭격 마인드도 부족했지만, 중폭격기 부대 건설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 그런데 전쟁이 당겨짐으로써 그것도 부족했던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중도에 좌절된 우랄 보머(Ural Bomber), 우랄 산맥 너머 소련 공업 중심지를 타격 한다는 그 4발 폭격기의 후계 프로젝트도 다시 살아나고, 이후 나왔던 아메리카 보머(America Bomber), 대서양 너머 미국까지 폭격하겠다는 그 초장거리 폭격기들도 장비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독일 공군은 경폭격기에 매달린다. 전략 폭격엔 전혀 능력이 없는 발이 짧고 펀치력 약한 경폭격기한테.



*영국의 4발 중폭격기 중 1번 타자, 쇼트 스털링. 마치 기묘한 거인의 풍모다. 그런데 독일은 이때 쌍발기 하인켈 He-111의 성능에 만족하고 있었다. 출처: alamy.com



그런데 히틀러는 왜 전쟁을 그렇게 서둘렀지? 



히틀러가 4년 일찍, 전쟁을 시작한 이유



순전히 히틀러 잘못이다. 자기도 그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이게 뭔 얘긴가? 전쟁을 시작했는데, 전쟁으로 비화될 줄 몰랐다고?


1933년 정권을 잡은 뒤, 35년 베르사이유 조약을 팽개치고 드디어 독일 군의 소원, 재무장을 시작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군대다운 전투력을 갖고, 독일 경제가 날로 발전하는 게 보이자(당시 경제 발전 속도는 대단했다), 그의 제한 없는 침략 근성이 발동한다.


아직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부족하지만 그들과 싸우지 않고, 영토를 늘린 방법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또 자기네 국민한테 엄청난 기쁨과 자기의 권위를 높여 줄 일.


가장 먼저가 비무장 공간인 라인란트 진주, 이어서 오스트리아를 합병한다. 물론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모국이면서 같은 게르만에 속하는 이란성 쌍둥이 국가.


1차 대전도 오스트리아 때문에 일어났고 그래서 참전한 게 독일 아니었던가? 그런 이유로 히틀러의 이런 공격적 행동을, 당시 서방 연합국들은 그냥 억지로 봐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다. 물론 격렬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체코 자체가 국토의 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가운데 있으니,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은색이 독일 제 3제국이고 노란색이 체코슬로바키아다. 헝가리도 전통적으로 게르만 편. 그렇다면 체코는 사방이 적이다. 그래서 꼼짝없이 히틀러에게 먹힌다. 출처: sott.net



그래도 체코 쪽은 게르만이 아니다. 소련과 같은 계통인 슬라브 민족. 완전히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침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프랑스와 영국은 거세게 비판하고 날을 세운다.


그들도 이제는 유럽 대륙으로 밀려오는 전쟁의 먹구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챔벌린 수상은 뮌헨으로 날아가 히틀러에게 항의한다. 또 그러면 가만 안 두겠다는 걸 보여주려고.



*챔버린 수상을 맞는 히틀러, 자세히 보면 히틀러가 2계단 위에서 악수한다. 훨씬 커 보이려고? 그리고 이때가 1938년. 그런데 두 사람은 1년 뒤 일을 상상을 했을까? 출처: wikimedia.org



그때, 방문자인 영국 수상한테 히틀러가 한 약속.


“다음부터는 이런 짓 안 하겠소.”

아마 히틀러는 덧붙여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체코 땅엔 게르만 족들이 많이 사는데, 체코인들의 핍박을 많이 받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다음부턴 네버.’라고.



평화? 그런 건 내나 줘!



체코슬로바키아 침략으로 인한 국제적 반대 여론이 가라앉자, 히틀러는 다시 또 침략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다. 상대는 동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폴란드.


그런데 이 경우는 체코슬로바키아하고 달랐다. 폴란드가 작은 나라가 아닌 만큼 완전 전쟁에 해당되니까. 기갑사단들이 동원되고, 하늘에선 융커스 Ju-87 급강하 폭격기와 쌍발 폭격기들이 폭탄을 싣고, 폴란 국토와 하늘로 날아가는 본격적 침략 전쟁.


그때가 1939년 9월 1일.



*폴란드의 PZ-11 파라솔 전투기. 독일 폭격기 편대에 용감히 점프, 상당히 많은 타격을 준다. 그러나 메셔슈밋트한테 적수가 될 순 없다. 출처: pinimg.com



그런데 히틀러는 이 침공이 제2차 대전의 시작이라는 걸 몰랐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 사태처럼 격한 비난 성명을 내고, 방방 뜨다가 제 풀에 주저앉을 줄 알았으니까.


“지들이 무슨 전쟁을 벌여?”


독일 국민이 베르사이유 조약 하에 궁핍과 심한 인플레 속에서 살 때, 그들은 진탕 평화를 구가하며 영국은 인도에서 온 홍차나 마시고, 프랑스 인들은 캉캉 춤이나 보며 우아하게 살아왔으니, 누가 전쟁에의 엄두를 낼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영국이 먼저 전쟁을 결심하니까.



최후통첩



“이제는 못 참아!”


폴란드 침략 당일, 영국 챔벌린 수상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히틀러한테 최후통첩을 보낸다.


“군대를 도루 국경 밖으로 철수시켜라, 아니면 전쟁이다!”


무슨 개소리냐는 식으로 무시를 하자(세상 어느 지도자가 그렇다고 군대를 철수시키겠나?), 드디어, 영국은 이틀 후, 9월 3일 오전 11시 반, 전쟁을 선포한다. 프랑스도 뒤 따르고. 


히틀러의 착각에 의해, 6년여에 걸친 인류사상 가장 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부 끝)




김은기의 커피 테이블 토크


*제공 @snaparker



본문 맨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히틀러의 착각에 의해, 6년여에 걸친 인류사상 가장 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또 그것은 히틀러한테 뒤통수 맞은 챔벌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쟁 터지기 8개월 전 열린 뮌헨 회담 뒤,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자랑스럽게 협정서를 펄럭였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히틀러가 약속한 증거! 앞으론 오로지 평화만 생각하겠답니다.”



*출처: pbs.twimg.com



2차 대전 전의 유명한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등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다.


'Peace of Our Time!'


'우리 시대엔 오직 평화!’


그런데 히틀러는 그런 생각, 손톱만큼도 없었다. 발톱만큼의 인간적 양심도 없는 자이기에.


그의 가치관은 이렇다.


“얼룩말이 사자한테 잡혀 죽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왜? 힘이 없으니까.”


“우리 인간들도 자연의 일부이니, 똑같은 거야.”


그래서 약소국에 대한 침략과, 수반되는 인명의 희생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연의 법칙이니까.


그리고 챔벌린. 그는 독일이 약속을 어기고 폴란드를 침략하자, 분노하며 선전포고를 한다. 자기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평화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으니까. 이어 처칠한테 정권을 물려주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또 웃음거리도 된다.


“멍청이!”


“히틀러한테 전쟁의 문을 열어 준 자!”


“우유부단한 데다 지도자답지 않게 마음이 연약한 한심치!”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며, 종이를 흔드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가 된다. 띨띨한 인간의 상징으로.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평가하자는 거다.


“그래도 챔버린은 끝까지 전쟁을 막아내고자 했어.”


“어쨌든 선한 사람이었고 평화주의자였다고.”


물론 여기엔 문제가 있다. 그는 평화를 지키려다 때를 놓쳤다. 독일 군이 라인란트로 진주하고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 아니면 체코슬로바키아로 쳐들어 갈 때, 그때 프랑스와 함께 독일로 진군했다면?


후대의 역사는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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