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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파르타의 300과 걸프전의 300

김은기의 전쟁과 평화 2014. 1. 30. 01:07
영화 '스파르타 총공격’



어렸을 때, 본 영화가 있습니다. ‘스파르타 총공격’ 당연히 전쟁 영화입니다. 2006년에 다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던 잭 스나이더 감독작 ‘300’의 포어런너(forerunner, 선도자)이기도 하죠. 그런데 하도 옛날에 봐서 주인공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납니다. 그래도 생각나는 게, 두 군데 정도 있습니다. 


무려 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온 페르시아 왕 중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스파르타 인에게 고합니다. 

“항복을 안 하면 우리의 화살이 태양을 가릴 것이다.”


스파르타가 응답하죠.

“그럼 우린 흐린 날을 골라 싸워야 되겠군.”



*스파르타 총공격. 출처: imdb.com




역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뒤이어 클라이맥스 전투 씬이 시작되고, 스파르타 군 모두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죠. 높다란 마차 위에서 사방에 널린 시체를 바라보는 페르시아 왕. 몹시 침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데, 마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전쟁이라는 건, 정말 싫다. 그냥 집에 가고 싶어......”


뒤이은 엔딩 크레딧.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테르모필레 전투입니다. 무려 2500년 전에 벌어진 아득한 날의 전투지만, 서구인에겐 몹시 중요한 전투로 자리매김합니다. 마치 우리의 한산대첩이나 명량대첩처럼 말이죠. 왜냐하면 이 전투로 인해 동양의 전제주의와 야만, 폭력으로부터 자기네 서구가 지켜졌고, 이후 동양을 압도하는 힘을 짧은 기간에 키워, 거의 2500년 동안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아마존이나 반즈 앤 노블 등의 온라인 서점에서 보면, 이 전투에 대한 책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제목들로 말이죠.


테르모필레: 세상을 바꾼 전투(Thermopylae: The Battle that changed the world), 

테르모필레: 서구 문명을 위한 전투(Thermopylae: The Battle for the West), 

테르모필레: 죽음을 앞 둔 300명의 결전(Thermopylae: Last stand of 300) 등등. 


그리고 국내에 좀 알려진 책으로  스티븐 프레스필드라는 작가의 불의 문(Gate of Fire: an epic novel of the Battle of Thermopylae)이 있죠. 서구인들은 왜 이 전투에 그렇게 매료 되는가? 아마 그것은 중과부적 숫자일 것 같습니다. 단지 300명으로...


지금으로 치면 겨우 2개 중대에 해당하나, 그들이 덤벼든 건 1백만이 넘는 페르시아 대군. 달랑 2개 중대가 수 십 개 사단과 맞서 싸웠다는 얘깁니다. 그리곤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이, 장렬히 죽어가죠. 영화의 카피에도 그게 나옵니다. 관객을 끌어들이는 키포인트로. ‘3백 대(對) 1백 만’


그 소수의 병력이, 동양의 전제주의와 야만, 무지, 폭력으로부터 서구문명을 지켜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후 2천 수 백년 이상을, 오히려 동양을 압도하며 헤게모니를 잡고는, 지구상 가장 성공한 문명으로 군림을 했으니, 서구인들의 생각이 그리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숫자들이 틀렸다는 것이죠. 3백이라는 숫자와 백만이라는 숫자, 다 엉터리입니다. 한 쪽은 지나치게 과장을 했고, 한 쪽은 엄청나게 축소를 했습니다.

 


십만 명 동원은, 제 1차 대전 이후에나 가능했다.

 

 

우선 페르시아 군의 백만 명. 그 숫자가 정말 맞다고 하면, 페르시아 선봉대가 전투를 개시할 때, 후위부대는 이제 겨우 페르시아 땅을 출발하고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쭈욱 줄을 서서 행진해 가는 형태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리스 땅에 백만 명이 다 들어 왔다고 할 때, 그 좁은 땅에 엉덩이 비비고 앉을 곳도 마땅치 않지만, 밥 문제는 어떻게 해결을 할까요? 하루에 3백 만 끼가 필요하고 열흘이면 3천 만 끼가 필요한데, 이 식량들은 어떻게 조달하고 또 어떻게 조리를 하고, 조리할 때 땔감은 도대체 어디서 그래서 백 만은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로부터 백 년 후. 알렉산더가 발흥합니다. 그리스의 주인이 되죠. 그리고 자기 휘하의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 군을 합쳐 출격을 하는데, 목표가 모두가 잘 아는 것 처럼 아시아 정벌이었죠. 그런데 알렉산더가 세계 최대 제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인도까지 쳐 들어갔을 때, 휘하의 병력이 얼마였을까요? 맥시멈이 4만 5천입니다. 그 병력으로 당시의 문명세계, 반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아득한 시대에, 어떻게 1백만을 동원할까요?


사실 유럽에서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전선으로 이동시키고 배치하는 건, 20세기 이후에나 가능했지, 그 전에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제 1차 대전 때나 10만 명을 동원했다, 이거죠. 이유가 있습니다. 내연기관의 발명입니다. 트럭과 열차라는 게 나오고, 그걸로 실어 나를 수 있었으니...


물론 그 전에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같은, 좀 더 많은 병력의 동원이 없었던 게 아니나, 그건 하나의 국가나 민족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때, 가능한 일이었죠. 그래서 오죽하면 프랑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까요.


“프랑스 남자의 키가 작은 건, 나폴레옹 때, 키 큰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다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건곤일척, 맥시멈의 전쟁을 벌일 때나, 10만이 가능했을 뿐, 그 이외의 전쟁에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사가들은 당시의 페르시아 군을 5만으로 잡아주기도 하고, 누구는 10만, 누구는 최대으로 20만을 잡아 줍니다. 그렇다면 중간으로 잡아 10여만? ‘역사의 아버지라 불려지는 헤로도토스’가 470만으로 기록한 거하곤, 하늘과 땅 차이의 병력 숫자입니다.



*300. 출처: 다음 영화



이번엔 병력을 축수시킨 게 있습니다. 페르시아 병력은 지나치게 과장하고, 그리스 병력은 엄청나게 축소하고... 맞서 싸운 스파르타 군 병력에 관한 얘깁니다.


300명이 아니죠, 더 많았습니다. 처음은 그리스 연합군 1만 명이었습니다. 그 1만 명으로 전투를 개시했는데, 배신자에 의해 뒷길이 알려진 후,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부대 암타카(불멸의 1만인 부대)가 들이닥치자, 주력이 철수합니다. 그리고 남은 게 테베군 3백, 테스피아이 7백, 그리고 스파르타 3백이 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태야 할 게 있습니다. 전투에 따라다니는 종자들이죠. 


미드 ’왕좌의 게임’을 봐도 꼭 종자들을 붙이고 다니죠. 소설 ‘불의 문’에서도, 전투에서 살아남은 한 종자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듯 이 종자들도 꽤 많았을 겁니다. 이들 숫자가 라스트 맨 스탠딩이 된 것입니다.(물론 테베군 3백 명은 먼저 항복했지만그래서 영화의 카피에서처럼 페르시아 백만 대 300이라는 건, 올바른 게 아닙니다. 정확히 얘기한다고 하면 10만 대 2천, 이 정도 쯤 되겠죠. 그리고 그 2천이라는 숫자 속에 스파르타 병사 300이 속해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런데 무려 2천 5백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나서, 300이라는 숫자가 다시 전쟁터에 회자됩니다. 그러니까 20세기 말 쯤에서 말이죠. 그리고 이번의 경우, 꽤나 진정성이 있습니다. 과장도 축소도 아닌 진정한 숫자 ‘300’ 허나 라스트 맨 스탠딩 식의 장렬한 케이스는 아닙니다. 그 대신 경악이 있죠. 그야말로 언빌리버블하며 인크레더블한 전투. 아마 이 새로운 ‘300’에 대해 읽게 된다면, 처음엔 놀라고, 그 다음엔 이런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아니 이게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승자에 의해서만 기록됐던 기원전의 전투가 아니라, 세상 온갖 언론 매체가 공존하던, 지금 이 시대의 전투였으니. 새로운 ‘300’. 그 신화의 현장은 걸프전입니다.



사막의 기갑전투


 

1991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전파를 탑니다.


"이라크 군, 쿠웨이트로 진격!" 


거의 10여 년 동안 이란과 싸우면서, 전기를 닦아온 이라크 군은 순식간에 쿠웨이트를 유린해 버렸죠. 그리고 세상이 알다시피 다국적군이 조직됩니다. 걸프전의 시작입니다. 이때 영국도 대량의 기갑부대를 파견했는데, 독일에 주둔해 있던 라인군단에서 제 7장갑여단(그 유명한 사막의 생쥐, ‘데저트 랏’으로, 롬멜과 북 아프리카에서 사투를 벌였던 전통의 그 부대입니다)을 차출하고, 뒤이어 제 4장갑여단도 보냅니다. 그리고 사우디 현지에서 두 여단을 합쳐, 임시 사단을 만들죠. 1 KUKAD라 하는 사막의 제 1기갑 사단입니다. 이때의 탱크는 챌린저 1이며, 숫자는 176량.




*챌린저1. 출처: wikimedia



그런데 이 기갑사단의 문제는 탱크였습니다. 챌린저 탱크. 미덥지 못 한 탱크로 소문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눈에 보기엔 이 챌린저가 뭐랄까? 피지컬만 강렬한 탱크? 프랑스의 AMX-30이나 독일의 레오파드 초기 형처럼 날렵한 감은 없고, 대신 전신갑주로 중무장한 한 두터운 인상을 줍니다. 개발 초기엔 어떤 포탄도 뚫지 못 한다고 선전했던 무직한(?) ‘초브햄’ 장갑을 차체와 포탑에 입혔으며, 탱크 포 또한 세상이 다 활강포 쪽으로 가는데(우리나라 K1 후기형과 흑표도 활강포죠.) 혼자만 라이플 포, 다시 말해 옛날 방식의 강선포를 갖고 있었죠. 그래서 상대한테 정통으로 맞아도, 그저 움칠할 뿐 끄떡 없을 것 같고, 반대로 공격 시에는 120밀리 강선포로 어떤 탱크도 단번에 아작 낼 거 같은 느낌도 줍니다. 


그야말로 중무장의 하드펀처. 그런데 그것은 외관상 느껴지는 것이고, 실제 평판은 그 반대였습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당시 참전했던 다국적군 지휘관들이, 은근슬쩍 이렇게 평가절하하고 있었으니까요. ‘덩치는 크나, 우둔한 놈’, ‘하드 펀처인 것은 확실하나, 그걸 제대로 갖다 맞추질 못 하는 놈’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CAT라는 대회 때문이었죠. CAT. 캐나디언 아미 트로피(Canadian Army Thropy)의 약자인데, 냉전이 한창 거세질 때 유럽 주둔 캐나다 군이 만든 은색 탱크 모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탱크는 냉전시대, 유럽 주둔 모든 기갑부대가 갖고 싶어 하는, 명예의 상징이 되죠. 


왜냐하면 각기 자기나라 기갑부대에서, 일단 고수로 인정된 부대가 다시 모여, 국제적인 탱크 배틀을 벌이고, 거기서 1등을 할 때만 수여받는 트로피 였으니까요. 그리고 참가하는 나라와 탱크들은 미국은 M-1에이브럼스와 M-60, 독일은 레오파드 2, 영국은 치프틴에 뒤이은 챌린저, 그리고 네델란드와 벨기에는 자국 산 탱크가 없으므로, 독일에서 도입한 레오파드 1 아니면 2, (프랑스의 AMX 30이나 ‘르 클레르’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나토의 군사 부분에서 탈퇴를 한 게 프랑스이니까.)

 

이러니 어느 나라, 어느 부대인들, 트로피가 탐나지 않았겠습니까? 승리를 하면 문자 그대로 유럽 최강이 되는 동시에 굉장한 보너스가 따라오는데... 그 나라의 무기 기술의 집약체이며, 정수를 모아 놓은 탱크가 다른 나라 탱크보다 우월하다는 평판에... 반대로 성적이 안 좋을 땐, 그 나라 탱크 기술까지 도매금으로 다운 그레이드 되고 바로 수출에 빨간불 켜집니다. 타 국가들이 탱크를 구입할 때 이보다 더 좋은 성능비교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영국의 성적은 항상 신통치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치프틴 탱크의 전성기가 지났다고 판단한 영국, 1987년도에 열리는 다음 대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일단 최신형인 챌린저를 내 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맹연습을 시킵니다. 그리고 대회의 주요 부분이 전차포 실탄사격이라, 무지막지하게 실탄 사격 연습을 시키는데, 이때 쏜 포탄이 6600발! 당시의 돈으로 290만 달러나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약 출전을 하죠.


그런데 맙소사! 이번에도 최하위! M-1 에이브럼스의 명중률이 94프로, 레오파드 2도 92프로가 나왔는데, 챌린저는 75프로! 그뿐만이 아닙니다. 1개 기갑소대의 탱크 4대가 진입을 하면서, 대당 8발 씩 쏘는 카테고리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M-1은 평균 발사속도가 9.1초이고 레오파드가 9초 6으로 나왔습니다. 290만 달러어치나 연습하고 나온 챌린저는 12초 6. 


탱크의 모국(母國)이 대 망신을 당한 겁니다. 그렇게 돈을 쓰며, 그렇게 연습까지 시켰는데... 그리고 이 초라한 성적은, 영국 언론과 의회에서도 문제가 돼, 육군과 기갑부대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죠.



*캐나디안 아미 트로피. 출처: 43tankbataljon.nl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CAT라는 게 기본적으로 사격 콘테스트인데, 챌린저는 사격통제장치가 구닥다리였죠. 그래서 영국 기술진은 87년 망신 사건 이후, 다른 것보다, 사통장치 개량에 힘을 씁니다. 탱크는 포를 쏘려고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다 걸프전이 터집니다. 그리고 걸프전의 무대는 사막. 기동전의 공간이며, 탱크전의 홈그라운드이기도 합니다. 


2개의 여단이 사우디로 건너 와, 이라크 국경을 넘어 진격하죠. 물론 다국적 연합군의 다른 기갑부대들도 같이 진격을 합니다. 당시로서는 톱 클래스의 탱크들, M-1 에이브럼스와 M-60, 르 클레르와 AMX-30 등등과 함께. 그리고 1백 시간 전쟁이라 붙여진 지상전이 끝납니다. 이라크 군의 완패였죠. 


그런데 다국적군의 여러 타입 중, 가장 뛰어난 평가를 받은 건 어떤 거였을까요? 의외로 챌린저였습니다. 덩치만 크고 굼뜨다던 영국 탱크. 챌린저는 무려 300대의 이라크 군 탱크를 격파했기 때문이죠.



진짜 300



그런데 챌린저는 몇 대가 격파됐을 까요? 놀라지 마십쇼. 제로입니다. 단 1대도 탱크 배틀에서 잃은 게 없었습니다. 킬 레이쇼, 0 대 300! 그야말로 경악을 머금게 하는 전훈을 올렸습니다. 작살난 이라크 부대는 이라크 제 12기갑 사단과, 여타 사단의 예하 기갑부대!

 

처음엔 국경을 넘어 그대로 진격하다가, 쿠웨이트에서 후퇴하는 이라크 기갑사단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래서 방향을 돌려, 2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이라크 제 12기갑사단과 다른 기갑부대들을 포위하고 탱크 전에 들어 갑니다. 그리고 12기갑을 완전 박살내고(기갑사단 하나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단 이틀 만에 소멸시켜? 맙소사!), 다른 탱크들도 같은 운명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쪽에선 1대의 손해도 없이, 300대를?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제 2차 대전 시, 독일 탱크와 소련 탱크의 킬 레이쇼는 보통 1대4에서 1대5였습니다. 미국과 독일은 어땠을까요? 미국 여러모로 불리했습니다. 참전이 워낙 늦어, 승무원의 전투 경험이 일천하다는 부분도 있고, 또 주력 탱크인 ‘셔먼’이 독일 탱크병으로부터 ‘불타는 밥솥’ 아니면 ‘미국제 라이터’라 업신여김 받던 탱크였으니.. 그에 반해 독일은 1939년부터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 러시아 전선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탱크 전의 베테랑들. 그래서 양 쪽의 탱크 전은 1대 3에서 1대 4정도의 킬 레이쇼가 나왔다고 합니다.


독일 탱크가 1대 격파될 때까지 미국 탱크 3~4대를 잡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후진 소련 탱크 병이나 아마추어 미군도 4~5대 격파당할 때, 최강 독일의 탱크 1대는 잡는다. 이런 얘긴데, 걸프전에서의 이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한 쪽이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상대 탱크를 잡기 위해, 서로가 죽을힘을 다해 포를 쏘고, 기동하고, 아니면 땅을 깊숙이 파 차체는 숨기고, 냉면 그릇 달랑 엎어놓은 것 같은 포탑만 남겨 놓고(소련 탱크들은 피탄 면적이 엄청 작습니다), 유리한 상태에서 요격을 해대는 이라크 쪽인데, 300대나 당하면서, 단 1대도 잡질 못 해?



*걸프전 당시, '함무라비'나 '메디나 기갑사단'의 주력이던 탱크 '아사드 바빌'. 출처:wikimedia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당시, 챌린저는 4킬로 밖의 이라크 탱크를 정확히 맞춰, 폭발을 시켰다.’ 


걸어가려면 1시간이나 되는 그 먼 거리에서 적 탱크를 잡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어떻게 그런 거리에서 상대를 하지만 그것보다 한 수 더 뜨는 기록도, 보입니다.

 

‘5.2킬로 밖의 적 탱크도 이때, 정확히 맞췄다.’


맙소사! 5.2 킬로? 이 기록들이 허위라고만은 볼 수 없는 게, 전투가 벌어진 데가 사막이라는 점입니다. 시야를 가릴 만 한 것들이 없고, 거기에 공기 중 습도가 없어, 아주 멀리까지 잘 보이니까요. 물론 이런 얘기가 대두되곤 합니다.


“영국이 만난 건 이라크의 톱클래스들이 아니었다. 만약에 ‘아사드 바빌(바빌로니아의 사자, 소련의 최신예 T-72)’로 무장한, 정예의 공화국 수비대 기갑사단과 붙었다면, 그런 스코어, 절대 못 낸다.”

 

그러니까 T-54, T-55, T-62 등 한 세대 전의 탱크와 싸워, 그런 스코어를 냈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0대 300은 대단한 전과입니다. 아마 지구상에 탱크라는 무기가 존재하고, 탱크 배틀이 계속되는 한 절대 깨질 수 없는 킬 레이쇼. 그래서 필자는 ‘아사드 바빌’로 장비한 ‘함부라비’나 ‘메디나 기갑사단’과 붙었다 해도, 원 사이드 게임은 여전했으리라 예상합니다. 챌린저는 비장의 무기를 숨겨놓았다고 하니까요. L26A1 철갑탄이죠.

 

포탄의 페네트레이터에 열화우라늄을 사용한 신종 철갑탄입니다. 철갑탄은 운동 에너지 탄이라 해, 고속으로 그냥 뚫어버리거죠. 그래서 공화국 수비대 기갑사단은 챌린저와 만나지 않은 걸, 알라 신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엔 장난으로라도 맞으면 안 되는 게 있으니까요.


아니 그럼, 제 12 기갑 사단 같은 걸, 으깰 땐 뭐로 했는데?

 

우리 한국군 기갑병들이 흔히 ‘비탄’이라고 하는 대 전차 고폭탄(HEAT)이나, 일반 철갑탄(‘날탄’이라고 하죠)을 썼다고 합니다. 고폭탄 같은 건 아무래도 관통력이 조금 떨어지는데, 이건 뭐 입을 한 번 더 벌어지게 만드는 얘기입니다. 갖고 있는 능력의 맥시멈을 끌어내지 않고도, 적 탱크 300대를 장사지냈으니까요.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어째서 챌린저는 이토록 일방적인가? 한 마디로 영국 기갑병들의 우수성과, 챌린저의 개과천선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영국군이야 어쨌든 저쨌든 정예로 유명하고, 챌린저는 CAT 대회 이래 약점으로 대두됐던, 사격통제장치의 지속적인 개량이 이루어 졌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외부적 요인, 전투 공간 자체에 승기(勝氣)가 있었습니다. 챌린저가 싸웠던 곳. 사막입니다. 사방이 오픈 돼 있어 시야가 넓은 곳.


이런 곳에서의 탱크 배틀은, 거리가 먼 상태에서 시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쏘기 위해, 거리를 당기자! 이런 생각하다간 상대한테 먼저 얻어맞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로가 먼 거리에서부터 포화를 교환하는데, 소련제의 T 시리즈들은 이런 전투에서 쥐약이라는 사실입니다. 상대를 잘 맞출 수가 없거든요. 사격통제장치가 우수하지 못한 것도 있으나, 결정적인 건 그들의 주포 성능입니다. T-62부터 활강포를 쓰는데, 이게 여러 가지 유리한 게 많지만, 포탄이 먼 거리를 날아가면서 급격히 탄도가 불안해 집니다. 그래서 거리가 멀면 멀수록 엉뚱한 데 떨어지죠.


허나 챌린저는 그 반대입니다. 활강포가 아니라 강선포를 달고 있습니다. 그것도 서방측 모든 120포 중 가장 정확하면서 펀치력이 센 강선포. 그리고 아주 정확합니다. 3~4킬로 사이를 두고 서로가 쏘기 시작합니다. 이때 T-62는 3발에서 4발 정도를 쏴, 겨우 탄도 수정, 맞추기 시작하는데, 챌린저는 그냥 첫 방에 맞추는 거죠. 명중. 그러니까, 이라크 12기갑 사단의 T-62가 첫발에 실패하고, 두 발 째를 쏘려고 장진하는데, 그때 ‘쿠앙~’하면서 엄청난 충격이 탱크를 흔드는 거죠. 그리고 한 대, 두 대, 연달아 격파되기 시작하죠. 어떤 건 포탑이 날아가고, 어떤 건 포탑에 구멍이 뚫린 체, 움직이지 않고 기갑 사단 전체가 궤멸되는 순간입니다.

 


*Major-General Patrick Cordingley. 출처: dailymail.co.uk



전쟁이 끝난 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챌린저의 위상은 180도 바뀌어 있었고, 챌린저 제 7기갑여단단장 패트릭 코팅그리(준장)는 가슴을 쭉 펴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계통에서는 제법 유명한 얘기인데...

 

“우리 챌린저는 사격대회용 탱크가 아니다. 실전에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엄연한 실전용 탱크다.”






[김은기의 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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