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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보기/독일은 제2차 대전에서 왜 패배했나?

#78 독일은 제2차 대전에서 왜 패배했나? (11부) - 대미 선전포고! II

by wenaon 2019.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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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대전 중 최다 생산의 미군 4발 중폭격기 B-24 리버레이터. 출처: homepage.eircom.net



미국을 얕잡아 본 히틀러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특이하게 3번 연거푸 당선된 사람이다. 미국은 원래 2번 이상 대통령을 못 하게 돼 있다. 그런데 어떻게 3번까지? 워낙에 재임 중 공적이 많았고 국민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3번 째 선거 전 때 이런 공약을 내 세웠다.


“절대로 미국을 유럽 전쟁에 뛰어들게 하지 않겠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출처: pinimg.com



사실 미국 사람들은 유럽과 동질감을 느끼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들은 신대륙이고 유럽은 구대륙. 또 중남미가 자기들 앞마당이고 더 가깝지, 유럽은 한 치 넘어 두 치, 아니면 그 너머로 생각해 왔다. 더군다나 전쟁이라는 건 좋은 게 아니다. 자기네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뭣 보다 많은 세금이 시민 복지보다 전쟁터에 뿌려져야 한다. 더군다나 당시는 전쟁 초기라, 히틀러가 그렇게 반인륜적 행위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심정적으론 영국편인 게 분명했다. 어쨌든 영국인들이 들어 와 세운 나라 아닌가? 그리고 주류층은 앵글로 섹슨, 영국계 후손들. 거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우, 독재자 히틀러를 내심 민주주의와 인권, 인류 문명에 별 도움이 못 되는 인간으로 생각해, 혼자 남아 싸우는 영국을 도와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에게 슬금슬금 무기 원조하는 것. 국내 여론도 거기까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지 않는 상태. 그래서 어떤 땐 현찰을 받고, 어떤 때는 또 외상으로, 무기를 원조해 주곤 한다.



마음은 있었으나, 참전은 곤란했다



당연히 미국의 군수산업체는 호황 조짐. 낭떠러지에 서있는 영국은 전투기, 폭격기, 또 대잠용 호위 구축함 같은 것들의 매입 또는 원조를 희망하고, 어떤 건 대량으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별 볼일 없던 평범한 소형 여객기도 현찰 받고 수출했다. U-보트 잡는 해상 초계기로 영국이 사용했기 때문이다(지금은 세계 최대 무기회사가 된 록히드사의 허드슨 여객기다).



*몹시 뚱뚱한 대잠 초계기. 당시의 중형 여객기에다 총탑 하나를 단, 변신 초계기다. 아래 쪽 흰색은 영국의 동양 항공부대 허드슨. 출처: flickr.com



또 하나, 여담이지만 이 때 주문한 것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무스탕 전투기의 원형이다. 영국에서 온 무기 구매 사절단이 크지도 않은 비행기 제조회사 ‘노스 아메리칸’을 방문. 그냥 중간 정도 성능이라도 좋으니, 전투기를 빨리 만들어 달라 했는데, 그게 발전해 항공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기체가 된다.



*무스탕 전투기 원형의 비행. 걸작 중의 걸작이 될 줄은 아직 몰랐을 때다. 출처: mediad.publicbroadcasting.net



그리고 얼마 뒤 일본은 진주만을 들이친다, 반전 여론이고 뭐고 갑자기 미국을 전쟁판에 뛰어들게 하는 기습. 아시아에서 약한 나라들만 괴롭히고 침략 질 하는 일본을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프레씽하는 것만이 당장의 전략이었는데, 야비하게 일요일 아침, 침대에 누워 이제 일어날까? 저제 일어날까? 이런 생각 할 때 들이친 것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 히틀러, 이 자는 또 뭔가? 가만있어도 되는데 지가 먼저 전쟁을 선포 한다. 12월 7일, 기습을 당해 모든 미국 국민이 분노에 떨고 있는데, 딱 나흘 후인 12월 11일이다. 언젠가는 해야 하겠으나, 아직은 확실한 전쟁 생각이 없는 미국한테다.



미국의 참전은 기정사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이다



먼 시각으로 보면, 미국의 참전은 기정사실이라고 생각된다. 1차 대전 때도 처음엔 참전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직 영국에 우호적인 ‘민주주의 무기제조창’으로 가고 있을 때(물론 대서양을 작전 해역으로 삼는 독일 U-보트와 충돌은 있었다), 다시 말해 참전 주의자들 입장에선 울고 싶어 죽겠는데, 일본이 느닷없이 뺨을 때린 뒤, 지들끼리 친구라며 독일이 일본 편을 들며 ‘한 대 더 맞을래?’ 이따위 소릴 하는 격.


그럼 이제 진짜 전쟁이다. 거인에게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충분히 준 것. 또 그것은 누가 뭐래도 야비하게 기습을 받은 입장에서의 올바른 복수이며, 민주주의와 문명 세계를 위한 전쟁도 되는 것이다.


미국이 응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대서양 건너 히틀러는?


물론 히틀러도 바보 멍청이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단 4일 만에 서둘러 선전포고를 한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전 편에 밝혔지만, 지금 모스크바 인근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는 히틀러에게, 일본이 시베리아 쪽으로 쳐들어 올 거라는 생각. 그래서 소련을 동서 양쪽에서 들이치는 희망에서다.


또 하나는 미국이 유럽 쪽에다 신경을 덜 쓸 거라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미국은 본격적으로 일본과 싸워야 하니까.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몰입한다.



따라서 이젠 일본이 잘 싸워주는 게 히틀러와 독일의 바램. 그 대단한 나라 일본이 미국한테 타격을 많이 주는 만큼, 워싱턴은 유럽 쪽에 신경을 덜 쓸 테니까. 그런 이유로 자기네는 일본을 열심히 응원해 줘야 된다. 미국이 태평양 쪽 말고는 다른 데 안 쳐다보게.


그런데 미국은 그게 아니었다. 방대한 국토와 자원, 인구를 가지지 않았는가? 거기에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업력과 좋은 기술력이 있다. 또 질 좋은 노동력도 있다. 따라서 태평양과 대서양 이 두 전역에서 전쟁을 치룰 충분한 힘이 있었다. 일본한테 반격전을 전개하면서 독일군과 싸울 충분한 전투력이 있다는 얘기다.


히틀러는 그걸 잘 몰랐다. 애초부터 미국을 그리 높이 보지 않았으니까




히틀러는 미국을 얕잡아봤다



일단 히틀러는 미국을 좀 우습게 봤다. 나라는 클지 몰라도 유럽에서 원래 별 볼일 없던 자들이, 배 타고 건너가 만든 나라. 그래서 전통도 없고 뿌리도 없고 역사가 짧은 신대륙의 신생국가.



그는 이런 얘기를 베를린의 외교 석상에서 했다고 한다. 상대가 아마 이태리 외교관이던가?


“아니, 그 놈의 나라에 무슨 예술이 있겠어? 수준 있는 음악이 있나? 미술이 있어? 문학이 있겠어? 그 한 예로 미국의 음악? 아프리카 흑인들한테 나온 싸구려잖아?”


히틀러는 원래 뮌헨의 화가 출신이다. 그래서 예술 부분에 대해 자기 지식을 떠벌인 거 같은 데, 실상 그는 외교관도 아니었고 여행가도 아니었으며 고위 직업군인도 아니었다. 고위 직업 군인리라면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있다.


주미 대사관의 무관으로서 미국이란 나라의 광대함과 저력을 잘 알고 있던 야마모토. 그는 미국과의 개전을 반대하다가, 결국 돌아서는데(그렇다고 해서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상대가 강하니, 싸우지 말자는 쪽이지), 그가 진주만 기습을 구상할 때, 이런 생각도 곁들여 한다.


“일단 기습을 해, 태평양 함대를 부순 다음, 몇 년 동안은 우리가 설치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힘에 부친다. 미국은 워낙에 큰 나라이니까. 그래서 그 안에 어떻게든 강화 조약을 맺어야 한다.).



*출처: emersonkent.com



그러나 다른 나를 가 본적 없는 이 거리의 화가는, 미국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자동차 산업이 세계에서 톱이고, 항공 산업도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으며, 군함의 조선 능력에 있어서도, 바다란 바다는 모두 자기네 제해권 아래에 뒀던 영국한테 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무기류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독일과는 전혀 다른 생산 방식과 사고를 갖고 있었다. 굳이 예를 든다면 거의 소련과 비슷하다고 할까?


소련의 무기 생산 필로소피는?


일단 대량 생산인데 미국도 그 짝이었다. 처음부터 생산의 편의성을 생각해 설계하고, 그런 시스템을 구축한다. 더구나 적은 수의 종류를 골라, 이걸 대량으로 생산한다. 그것도 소련과 비슷했다.


(독일은 그 반대였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다)



미국의 전쟁 적합 형, 생산 시스템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건 미국 무기의 질이다. 소련 무기와 다른 게 이 부분인데, 대량 생산을 한다 해도 질이 떨어지지 않아, 보통 이상은 된다는 것. 퀀티티도 좋고 퀄리티도 괜찮다는 얘기다. 많이 만들어 전선에 보내는데, 성능이 좋다. 이게 미국의 공업과 기술력 파워인데, 히틀러는 당체 거기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셔먼 탱크 공장, 그런데 앞에 보이는 라인만이 아니다. 뒤쪽으로도 제작 중인 셔먼이 많다. 출처: worldwarphotos.info



“그래봤자, 전체적 수준이 낮은 나라잖아?”


이런 식으로 업신여긴게 히틀러였다.


“지들이 언제 싸워봤어? 119세기 초, 워털루 전쟁터에 미군은 없었다고. 그때 마지막으로 나폴레옹 모가질 친 건, 우리 독일 군대야.”


군사 분야에서도 전통과 유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물론 미국 군대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군사적 전통이 짧은 나라인 만큼 분명히 있다.



미군의 단점



평상시에는 전쟁 준비를 게을리 한다는 거다. 원래가 민간인들이 세운 나라 아닌가? 농부나 상인, 목축업자들이 집에 있는 총을 들고 나와, 영국과 전쟁을 하고 독립한 나라인 만큼, 미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시민군이나 의용병을 선호하고 정규군을 싫어하는 기질이 있다.


그래서 평상시엔 정규군 숫자도 적게 가져가고 그쪽에다 예산을 많이 배정하지 않는다(지금은 정반대이나......). 헌데 그런 나라가 일단 전쟁에 돌입한다고 해 보자. 그 땐 얘기가 달라진다. 1940년 쯤의 미국이 갖고 있는 강대한 공업력과 기술력, 거기에 풍부한 자원을 동원해 군비 확충의 길로 들어설 게 분명하다. 그리고 결코 늦지 않을 만큼의 알맞은 시간에 질 좋은 무기들을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


병사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처음엔 질이 좀 낮다고 할까? 독일군이 보기엔 아마추어 수준? 초반의 북 아프리카 카세린 고개에서 독일군한테 형편무인지경으로 당하지 않았던가? 패튼 장군이 야전 병원을 방문 부상병들을 위문하는 차에, ‘난 전쟁이 싫어요. 흑,흑~’ 찔찔 울던 부상병을 때리기도 해, 무지 욕먹은 건 이 때의 일화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북 아프리카 미군의 신통찮은 전과에 매우 실망, 이런 얘기를 했다지 않은가? 이거 완전 실화다.


“왜 우리 미군은 이렇게 싸움을 못 하나?”


그런데 거기 까지다. 미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강해진다. 실패를 통해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고쳐나가는 것은 전 세계에서 미군이 최고다. 그러나 그렇게 강해질 때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이태리에서의 전투다.


대표적인게 카시노 산 전투. 안치오 전투.


특히 로마 아래 쪽 항구인 안치오 상륙 작전은 제 2차 대전을 통해, 미군에겐 매우 쓰라린 전투라 할만 했다.



*로마 바로 밑, 안치오(Anzio)가 보인다. 여기에서 쭉 나가면 이태리 반도 아래쪽 독일군은 포위되고, 위쪽의 로마는 해방이 된다. 그러나 멍청하게... 출처: windycitywonderer.files.wordpress.com



*저항은 없다. 안치오 항구에 상륙하는 미군. 그러나 이 항구에서 그냥 전진을 안 한다. 출처: ep.yimg.com



상륙은 했는데, 전진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 꼼짝 없이 교두보에 갇혔으니까, 반면 독일군은 병력을 여러 군데에서 끌어 모아 신속히 인근 산악지대로 포진. 그래서 서로 대치가 된 상태에서 독일군은 엄청난 무기를 사용한다.


'저걸 만들어서 언제 쓰지?'했던 초 중포들.



안치오 익스프레스



*출처: wikimedia.org



훨씬 더 큰 ‘안치오 애니’와 함께 유명한 거대 열차포, ‘안치오 익스프레스’. 1.2차 대전 때의 독일 전함이나 순양전함의 주포와 동일한 280밀리 구경으로 이게 워낙 크고 무거워, 열차로만 운반한다. 그래서 레일웨이 건, ‘열차포’라는 독특한 장르에 속하는데 독일군은 이 걸로 안치오 해안가에 머무는 미군 머리에다 연일 포탄을 날려버린다. 포탄은 거의 0.3톤. 물론 열차포라는 게 너무 무겁고, 철도 레일만으로 이동할 수 있다(그래서 나중 후퇴할 때 주요 부분만 망가뜨리고 그냥 두고 간 레일 건, 안치오 익스프레스).


그런데 일단 상륙은 했는데 움직이질 않자(이유는 있다. 더 단단히 교두보를 쌓는다는 등의 이유) 오죽하면 처칠이, 상륙만 하곤 전진을 안 하는 미군을 보고 이런 말을 했을까?


“안치오 해안가에 고래 한 마리 올려놓고 그냥 있는 거야, 뭐야?”


그러나 이후부터는 점점 달라진다. 북 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는 아마추어에 불과했으며 이태리에서는 세미프로. 그래서 고전을 하곤 했는데, 아직 프로로서는 미성숙 상태인 세미프로가 점차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피의 오마하 해안가로부터 진출한 미군은 진짜 독일군과 붙는다. 해안방어 사단이 아닌 동부전선의 숱한 전투에서 갈고 닦은 프로(독일군)들 하고.


그리고 그들은 당당히 프로가 된다. 아니 프로 중의 프로가 된다.


상륙한 지 2달 후, ‘파레즈 전투’에서다.


그곳에서 미군은 노련하면서도 용맹한 전투 프로들, 독일의 팔슈림 야거, 공수 사냥꾼 사단 1개를, SS, 무장 친위대 기갑사단 3개, 그리고 독일 국방군 1개 기갑사단. 거기에 히틀러 유겐트 부대에다가 다시 또 4개의 보병사단을 합친 대병력을 가둬놓고 완전 궤멸시킨다.


독일 노르망디 방어세력의 완전 소멸.


그렇다면 이 소멸전의 주역 미군은 프로 중의 프로가 아니고 뭐겠는가?


다음 편에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독일군 최대의 패배라 일컫는 ‘파레즈 포위전’과 이런 승리를 가능케한 미국의 무기 산업 시스템과 무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시리즈에 대해 끝내려 한다.


그 무기들은 역사상 최고의 전투기 무스탕, 하늘의 요새 4발 중폭 B-17, 거기에 특별하진 않으나 좋은 전차 M-4 셔먼.




*벌건 대낮, 독일 상공으로 들어가는 미군 중폭격기 B-17. 출처: wallpapers-all.com

 



2차 대전, 독일은 왜 패했나? 대미 선전포고! (II편 끝, III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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